명절이 코앞이다. 사우나 여자들의 이야기 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하나가 시댁이야기다.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어렵다는 이야기부터 남편이 시댁에 자주 가는 것이 불만인 여자도 있고 시댁 재산 자랑에 여념이 없는 사람도 있다. 명절 전이면 집집마다 전 부치는 이야기, 늦게 오는 동서 험담, 시댁에 가지 않는 남편을 자랑하는 사람들 이야기 등 소재가 무궁무진하다.
내가 사우나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30대 중반쯤이니 꽤 오랜 시간 취미로 즐긴 것 같다. 처음 구석에 앉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의 사생활을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늘어놓는 이유가 궁금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남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처럼 공감하고 반응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도 세상이란 것을 살아보니 다 이해가 된다. 이야기가 하고 싶은 사람들.
우리는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말할 상대가 없이 조금은 각자가 외로운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족이나 지인에게는 하기 불편하지만 언제 또 볼지 모르는 타인이 편한 상대가 되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누구인지 자세히 모르고 나에 대해 그다지 많은 관심이 없지만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거리 있는 누군가가 필요한 시점과 장소. 사우나는 그런 곳이다. 작고 밀폐된 공간에 촘촘히 붙어 앉아 박카스를 나누어 먹는 그런 사이. 몸을 말리고 옷을 입으면 누구인지 잘 알아보지 못하는 타인이 되는 딱 좋은 공간이다.
새벽반에는 주로 나이가 많은 언니들이 상주한다. 사우나에서는 엄마보다 나이가 많아도 언니라 부른다. 아줌마나 할머니 같은 호칭을 쓰지 않는다. 가끔 형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이를 본 적이 있지만 앞면을 트면 70넘은 할머니도 언니라 부르는 가벼운 사이가 된다. 회사 사장님도, 교장선생님도, 살림 9단 전업 주부도 모두 언니로 통하는 호칭이 나는 좋았다. 옷을 벗고 들어오는 순간 자신의 지위나 재력도 벗어 놓고 들어온다. 알몸으로 공평한 세상이다.
새벽반 언니들의 명절 이야기는 좀 특별하다. 시댁 험담이 아니라, 며느리 눈치 보는 이야기 사위 자랑, 손자, 손녀의 천재성 등이 주로 이야기된다. 그녀들이 시어머니나 장모이기 때문이다. 늘 며느리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를 듣다 시어머니 입장을 들으니 그들의 고민도 한 보따리였다. 며느리가 명절에 오지 않아도 서운함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언니 이야기가 마음에 꽂혔다. 아들이 직장에서 퇴사한 후 변변한 수입이 없어 며느리 눈치가 보인다며 속사정을 이야기하는데 마음이 딱했다. 주변 언니들은 명절이 별거냐며 연휴 내내 사우나에서 만나 맛있는 밥이나 먹으러 가자며 동지애를 발휘한 위로를 전했다.
내 새끼의 흠이 안타깝고 남의 새끼 고생시키는 것이 마음 아픈 엄마이야기는 누가 들어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어머니 시집살이에 시금치도 먹기 싫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나는 고약한 시어머니를 경험하지 못한 철없는 며느리라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자식들 사는 것이 늘 걱정되고 아들이건, 딸이건 내 자식과 함께 하는 남의 자식을 귀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
언니들은 사우나를 마치고 장을 보러 갈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식들을 위해 솜씨를 발휘하겠지. 자식과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것이라는 것을 요즘의 부모들은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들 둘을 키우고 미래의 시어머니가 될지도 모르는 나는, 새벽반 언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식에게 기대하지 않으려 애쓰는 애틋한 부모의 마음을 보았다.
자식은 가장 가까운 남이라는 어느 작가의 글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