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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말빛 Sep 23. 2024

바둑판의 빗대어

그녀들의 질서

수업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날이면 나는 gx룸에 들어가지 않고 대기실에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린다. 내가 서야 할 위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줌바의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한다. 그 선과 칸의 규칙을 지켜 그녀들은 움직인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적, 심리적 바둑판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거의 자리를 잡으면 나는 제일 뒷줄 가장 구석진 곳으로 간다. 내가 정한 나의 구역 안으로 진입한다. 가로줄의 간격은 팔다리를 움직임에 불편이 없어야 하고 세로줄은 강사의 움직임을 보는데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 흥겨운 춤사위가 시작되면 체스판의 말들이 움직이듯 강사의 신호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인다. 그리고 이내 제 자리를 찾는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물리적 거리의 유지. 서로를 따라 하고 자신을 뽐내고 싶어도 타인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함을 인지하는 심리적 거리의 유지.


이렇게 칸칸이 유지되던 선들이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 강사가 내려와 팔을 흔들면 그 뒤를 잡고 어릴 적 기차놀이를 하듯이 한 명씩 따라붙어 달팽이 모양으로 움직인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 해도 그 순간에는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웃으며 자연스럽게 타인의 옷깃을 잡는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고 하하거리며 웃는다. 줌바댄스의 매력인 것 같다.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고 타인의 행동에 방해가 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흥을 즐기는 것이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도치 않게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지나친 친밀감이 주는 부작용이 있다. 예를 들면 밖에서는 세상 깍듯한 우리 집 19세가 나만 보면 지랄 대마왕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어미 아니면 어디 가서 맘대로 할 수 있을까 이해를 하다가도 상처를 종종 받곤 한다. 그건 다른 가족들이 나에게 느끼는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가장 구석에 서서 늘 없는 듯 흐느적거리는 내 존재를 알릴 유일한 기회는 기차놀이다.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기꺼이 자신의 옷깃을 내어주는 순간의 친밀감이 좋다. 그리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면 각자의 칸에 충실한 남이 된다. 즐거운 순간을 함께하고 질척거림 없는 관계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회식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집요하게 2차, 3차를 권하는 상사의 추잡스러움이 싫었다.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 그 인연들이 모두 친밀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 있는 관계도 아니다. 나름의 질서를 정하고 그 틀 안에서 움직일 수 있다면 원치 않는 상처도, 관계유지를 위한 감정소모도 없을 것 같다.


우리 서로 조금은 긴장하며 즐기는 바둑기사처럼 살았으면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바둑판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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