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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H Jul 19. 2024

나는 어른이 돼 가고 있을까?

다시 찾은 반제에서

 베를린 S1를 타고 종점까지 달리면, 반제에 도착한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 손에 자주 이끌려 나왔던 이 거대한, 바다와도 같은 호수를 다시 찾기는 작년 이맘때였다. 함부르크에 가도 항구가 있지만, 한국이라는 곳에서 "진짜 바다"를 뒤로는 사실 이곳이 시시해지기도 했고, 공부하고, 약간의 심리적인 방황과 함께, 그런대로 치열하게 청소년기를 보내며, 잔잔한 물결을 보고 쉼을 얻을 마음의 여유가 사라지기도 했다. 그래서 일 년 전, 새로 사귄 친구와 이곳에 조금은 즉흥적으로 소풍을 왔을 때, 나는 못해도 오륙 년 만에 이 호수를 마주하고 설 수 있었다.


사진을 찍고 다가가서 보여 드리니, "너희 때가 참 예쁘다."라고 하셨다. 그 뜻을 바로 알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파란 하늘과 넓게 괸 물, 적당한 녹음을 배경으로 친구와 챙겨 나온 샌드위치, 맥주를 즐기며 수다를 떨다가, 근처에서 한참 조용히 책을 읽고 계시던 한 할아버지를 위해 자리를 옮겨 드리기로 했다. 일어나서 몇 걸음 옮기다가 뒤로 돌아 사진을 찍었는데, 그 순간, 작은 렌즈에 담긴 모습이 나는 참 좋았다. 액자에 담아 두고 싶은 풍경을 앞에 두고 좋아하는 책을 즐기는 노년이라, 모델이 돼 주신 할아버지께선 틀림없이 크고 작은 세월의 풍랑을 헤쳐 온 끝에, 모두가 부러워할, 소망해 마지않을 '평안'을 얻으신 듯했다. 옆에 있던 친구에게 나는 이 그림이 몹시 좋다고 했다.


 몇 걸음 옮기는데, 문득, 친구가 20년 뒤, 30년 뒤를 상상해 봤냐고, 그때 바라는 점이 있냐고 물어 왔다.


 "음... 예전에는 깊이 고민해 보기도 했고, 그러면서 걱정이 너무 쌓여서 당장 일이 년 뒤의 내 모습이 조금 두렵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런 상상을 할 때, 달리 바라는 점이 없어. 딱 하나, 한 살 한 살 예쁘게 나이 먹고 싶어."


가 내 대답이었다.


 개구리가 한 번 울 정도 시간, 아주 잠시, 정적이 흐르고,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내뱉었다. 그 순간, 친구는 "아, 우리가 어른이구나." 생각했단다. 나는 아직 내가 철이 없이 어리기만 하다고 생각했다.


 친구는 옷 가게에서, 또 모델로, 일하고, 그 일을 매우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싶다고. 학교에 다니다가 다시 베를린에 와서 일을 하는데, 이 도시가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돈이 없어도 섹시한 도시"라는 이야기를 늘 듣고 자랐는데, 이제는 그 매력조차 잃어가는 느낌이라고.


 이때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누구보다 이 도시를 사랑하고, 한 번도 내 고향, 내가 자란 동네를 자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그런데도 몇 년째 반복해서 권태기에 빠진다고.


 어쩌면, 이 도시가 문제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고. 누군가에게는 베를린이 여전히 힙하고, 충분히 매력적인 도시인데, 너나 나나 계속해서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는 이곳이 우리에게 하나의 '안전지대'라서가 아닐까, 주변은 다 어른이 됐는데, 나만 아직 어린아이처럼 느껴져서, 이제는 어린 새가 자기 날갯짓으로 둥지를 떠나듯이 이곳을 벗어나, '하늘'을 배워보고, 나를 시험해 봐야겠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언젠가 돌아올지도, 그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날개를 움직여 보기에 적합한 시기가 점점 다가옴을 본능적으로 아는 게 아닐까, 베를린을 더는 '안전지대'로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공중에서 떨어져 봐야 하지 않을까.


 또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의 시간이 흘렀고, 또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의 다음 말은 나를 울렸다. "아, 우리가 조금씩 어른이 돼 가나 봐."

 집으로 돌아오며 돌려준 내 대답은 "이렇게 어른이 돼 갔으면 좋겠네."였다.


반제에는 리버만 빌라가 있다. 호숫가의 푸른색과는 또 다른 마음의 안정을 주는 곳이다.


 이런 "지난여름날의 기억"을 뒤로하고, 지난주, 꼭 일 년 만에, 이번에는 홀로, 반제를 다시 찾았다.


 그 일 년 새, 또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휴학하고 일을 시작했고, 친구 몇몇은 졸업을 앞두고 있다. 휴학과 관계없이, 장장 열일곱 달을 매달린 논문을 '마침내' 출판했고, 부모님과 관계도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 보려고 했다. 돌아보면, 안 힘든 날은 없었는데, 요즈음,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마다 "얼굴 좋아졌다!"라고 말한다. 그 말이 참 고맙다.


 이따금 지치기도 한다. 내가 전력을 다하는 만큼 보상을 얻지 못하는 기분이 들고, 모아놓은 시간이나 여유도 없는 듯하다. 그러나 새로운 일을 배우고, 새로운 관계에 도전하며, 하나하나 내 한계에 도전해 보는 과정이 즐겁다. 전공 분야, 내가 제일 잘 알고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한두 발짝 떨어져서 새로운 에너지로 나를 채우는 중이다.


 리버만 빌라에서 지난 일 년을 돌아보다, 다시 탁 트인 전망으로 자리를 옮겨, 고개를 꺾고 털을 뽑는 오리를 보며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떠올렸다:


 "나는 어른이 돼 가고 있을까?"


 글쎼... 아직은 내가 어른이라고 말하지 못하겠다. 욕심도 많고, 겁도 많은 나는 '나'를 알아가는 중이고, '나'를 완성할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가고 있다. '지금 내 모습'에 안주하지 않고, 거센 바람을 맞을 각오로 세상에 나갈 용기를 키우고 있다. 이 끝이 없는 단계를 포기하지 않고 밟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어른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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