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시청자가 전화로 참여하는 실시간 공포썰 유튜브 방송의 열렬한 애청자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름 모를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풀어내는 기이한 경험담을 듣는 것은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귀신이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았다. 대본 없이 터져 나오는 날것의 감정, 어설프지만 진심이 묻어나는 이야기. 그것이야말로 진짜 공포의 본질이었다.
1. 고정 멤버와 무적의 해결사
하지만 채널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순수했던 감성은 서서히 빛을 바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방송에는 ‘인기 시참자’라는 고정 멤버들이 등장했다. 한두 번의 출연으로 족했던 평범한 사람들은 사라지고, 매주 새로운 사연을 준비해 오는 ‘프로 이야기꾼’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나 매끄럽고 완벽했다. 기승전결이 뚜렷했고, 극적인 반전이 있었으며, 말투는 점점 더 방송에 최적화되었다.
가장 큰 위화감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반복적인 패턴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의 사연에는 어김없이 ‘영적인 능력을 가진 지인’이 등장했다. 그 지인이 경고를 하면 무슨 일이 반드시 일어났지만, 주인공과 친구들은 수차례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응? 왜? 아무 일도 없는데?”라며 경고를 무시했다. 결국 사건이 터지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면, 그 무적의 지인이 나타나 모든 것을 해결하고 주인공은 무사히 살아남았다. 공포는 사라지고 영웅담만 남았다.
때로는 돈도 받지 않고 신의를 위해 움직이는 ‘무당 형님’이 치트키처럼 등장했다. 어떤 흉악한 귀신도 “야, 그거 건들지 말라 했지?”라는 형님의 한마디에 꽁무니를 뺐다. 시청자들은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에도 해결사가 나타나겠지.’ 그렇게, 예측 불가능한 공포는 예측 가능한 히어로물로 변질되었다.
2. 감정 쓰레기통이 된 2시간
더욱 나를 지치게 했던 것은, 공포라는 장르의 본질을 망각한 채 자신의 감정 배설구로 방송을 이용하는 시참자들이었다. 한번은 죽은 고양이에 대한 사연을 가진 시참자가 2시간 내내 방송을 장악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같은 내용을 다른 표현으로 세번씩 반복하는 화법을 구사하는 시참자였다.
즉, "고양이가 어딘가 이상해보여서 잘 살펴보았고 병원에 데려가야겠다고 판단했어요." "행동이 평소와 달라서 이상하게 느끼고 결국 병원에 데려갔어요" "우리 XX이가 많이 힘들어보였고 그래서 병원을 가게 되었어요" 식으로 같은 내용을 불필요하게 표현을 바꿔서 모든 내용들을 그런식으로 풀어내는 시참자였다.
그렇게 고양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게된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한 시간 반을 흘려보냈다. 1만 5천 명의 시청자들은 ‘뭔가 있겠지’하는 마음으로 인내했지만, 결국 이야기는 이렇다 할 공포 요소 없이 고양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슬픈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채팅창은 당연히 난리가 났지만, 일부 애묘인들은 “인정들이 없네”라며 시청자들을 비난했다. 진행자는 “저도 고양이를 키우는 입장이라 이해한다”며 상황을 어설프게 봉합했다. 나는 그 태도에 더 큰 실망을 느꼈다. 2시간 동안 수많은 시청자들은 공포를 기대했다가, 한 개인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이용당했을 뿐이었다.
3. 몰입이 깨져버린 밤
물론 아직도 그 방송을 재미있게 보는 사람들은 많다. 나는 그들이 부럽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몰입할 수 없게 되었다. 짜깁기한 듯한 사연, 인터넷 유명 썰을 자신이 겪은 일인 양 풀어내는 네임드 시참자,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영적 자부심에 취한 사람들. 쓸데없이 분석하지 않고 순수하게 즐기던 시절의 재미는 사라졌다.
어린 시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형이나 누나가 들려주는 무서운 이야기에 숨죽이던 그 밤의 감성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곳은 시청자를 모으기 위한 자극적인 쇼만 남았을 뿐이다. 하나의 재미있는 콘텐츠가 사라졌다는 아쉬움. 나는 이제 그 채널을 보지 않는다. 대신 조용한 밤이면, 그때 그 시절의 어설프지만 진심이 담겨 있던 첫 사연들을 가끔 떠올려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