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음악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접속하는 것이 되었다. 내 손안의 작은 스마트폰 하나면 세상의 모든 노래를 언제든 들을 수 있는 스트리밍의 시대. 하지만 나는 종종 이 편리한 풍요 속에서,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웠던 과거의 시간을 떠올린다. 그리고 묻는다. 좋은 음악이란 과연 무엇인가.
1. CD를 강요하던 시대의 촌극
2000년대 초반, MP3라는 새로운 기술이 세상을 휩쓸기 시작했을 때, 우리나라 가수들은 한목소리로 “MP3 금지”를 외쳤다. 그들의 논리는 기이했다. MP3로 한 곡씩 노래를 팔면, 대중은 듣고 싶은 타이틀곡만 소비하게 되고, 앨범 전체를 만들기 위한 수많은 수록곡들은 사장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미 사람들의 손에는 CD 플레이어 대신 MP3 플레이어가 들려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앨범 단위의 CD 구매를 강요했다.
더 큰 아이러니는, 무대 위에서는 MP3를 음악 산업의 파괴자로 규정하던 바로 그 가수들이, 광고판에서는 최신 MP3 플레이어를 손에 들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멍청한 투쟁은 결국 시장의 주도권을 통신사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주는 결과를 낳았다. 가수와 작곡가들은 자신들의 창작물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한참 뒤에야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창작물 대부분이 외면받고 타이틀곡만 소비되는 현실이 창작자로서 아쉬웠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아티스트적 감성’만으로는 대중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대중음악은 결국 대중에게 어필해야만 생명력을 갖는다. 상업적인 음악이 저질이라는 공식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모르는 이들의 멍청한 생각일 뿐이다.
2. 클래식이라는 이름의 권위
과거 기성세대들은 대중음악을 폄하하며 말했다. “저런 노래들은 10년 후면 아무도 안 들을 것이다. 클래식은 수백 년째 듣고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클래식은 영원한 가치를 지닌 ‘진짜 음악’이었고, 대중가요는 잠시 유행하다 사라질 ‘소모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90년대와 2000년대의 수많은 대중가요는 지금도 끊임없이 리메이크되며 새로운 세대에게 소비되고 있다. 오히려 그 리메이크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원곡이 가진 대체 불가능한 위대함을 다시금 깨닫는다. 빅뱅이 재해석한 이문세의 ‘붉은 노을’처럼, 과감한 스타일 변모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발라드 리메이크는 원곡의 감성을 넘어서지 못한다.
특히 발라드나 락발라드의 경우, 원곡을 부른 가수들이 대부분 타고난 재능의 소유자들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후배 가수들은 종종 키를 낮추고 더 세련된 기교를 부리지만, 원곡이 가졌던 날것의 절실함과 시대의 공기를 재현해내지는 못한다. 리메이크는 결국 원곡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하는 동시에, 그 벽이 얼마나 높은지를 확인시켜주는 아이러니한 과정이다.
3. 어제의 노래, 오늘의 목소리
나는 클래식 음악이 왜 좋은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듣기 싫은 것을 억지로 좋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음악은 교양이나 지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롯이 개인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 우리를 뜨겁게 했던 대중음악들이, 시간이라는 거대한 필터를 통과해 살아남아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목소리로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물론 나는 지금의 K-POP도 즐겨 듣는다. 세련된 사운드와 완벽한 퍼포먼스는 그 자체로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가끔은, 리메이크된 노래를 통해 원곡을 다시 찾아 듣는다. 어릴 때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노랫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그 노래들이 담고 있던 시대의 아픔과 사랑의 깊이를 비로소 이해한다.
어쩌면 좋은 음악이란, 그렇게 시간의 파도를 넘어, 어제의 목소리로 오늘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소란스러운 스트리밍의 시대에도 변치 않는, 그렇게 시간을 이기는 노래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