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있지.
네가 자꾸 꿈에 나와.
또 다. 네가 또 꿈에 나왔다. 이게 벌써 몇 번째야. 너와 눈을 맞대지 않은 시간 2년. 너의 소식조차 모르게 된 시간 3년. 도합 5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말이야. 꿈에서 나를 품에 욱여넣고,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너. 그런 너를 잊으려 하면 왜 계속 꿈에 나타나는지. 왜 자꾸 너를 기억나게 하는지.
쏟아지는 햇빛과 시원한 바람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무더운 여름날. 나의 끊임없는 구애를 외면하다 결국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날. 처음으로 손을 잡고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을 겨우 진정시킨 채, 새빨개진 볼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여 집으로 들어갔던 그 밤. 여전히 생생한 그날의 기억. 그날의 달은 유난히도 밝았고 너는 유독 더 빛났지. 너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서로 눈 맞추는 것도 어려워 딴 곳만 응시한 채 걷던 그날을.
하루라도 만나지 않으면 죽을병에 걸릴 듯 매일을 만났던 우리. 학생이라 마땅히 데이트할 장소가 없어 어느 날은 아파트 계단에서, 또 어느 날은 놀이터 벤치에서 나란히 앉아 반짝거리는 눈을 마주했다. 너의 눈에는 새카만 밤에 떠올라야 할 별들이 박혀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는 그저 너의 눈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았다.
우리의 사랑은 당연히 영원해야 했다. 내가 너를 얼마나 어렵게 얻었는데. 우리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데. 함께 피우고 있는 절대 불은 꺼지지 않을 거야. 밤하늘에 떠오른 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을 비웃듯 우리 사이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너무 빠르고 깊이 사랑했던 탓이었을까. 별이 가득했던 너의 눈엔 끝이 안 보이는 어둠이 존재하기 시작했고, 뜨겁게 타오르던 나의 마음에는 다 꺼져버린 불씨와 흩날리는 재만 있을 뿐이었다. 평생 함께 즐거워하자는 약속은 이미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텅 비어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덜 사랑했을 텐데. 마음이 빠르게 식지 않도록. 그래서 더 오래 사랑할 수 있도록.
관계의 끝을 고한 건 나였다. 연약한 내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숨이 막혀가던 때, 버릴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었다. 나는 너를 버려서라도 숨을 쉬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질식해 버릴 거 같았으니까. 어차피 나는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네가 미워졌고, 너는 그런 나를 외면하려 했기에 우리의 이별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떻게 해도 우리 관계는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 거였다. 그런데 너는 아니었나 보다. 불씨는 다시 타오를 수 있고 꺼져버린 빛은 다시 빛날 수 있다고 믿었나 보다.
떠나려는 나를 붙잡고 오랫동안 놔주지 않던 너. 제발 다시 생각해달라며 울어버린 너. 비어버린 나의 눈동자를 보며 결국엔 붙잡던 손을 놔주던 너. 너를 등진 채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나를 굳은 채로 바라보던 너. 내 등을 한참 동안 바라봤던 너는 어떤 눈을 하고 있었을까.
너를 떠난 후 맞이한 아침은 생각보다 평온했다. 아침마다 가장 먼저 와있는 메시지 하나가 사라졌을 뿐. 나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너의 공백이 외롭거나 슬프지도 않았다. 그러니 나의 선택은 틀림이 없음이 분명했다. 분명 그래야만 했다.
너를 떠나보내고 난 얼마 후,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내 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공허함인가. 아님 비애인 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감정이 온몸과 마음을 지배하기 전에 정신을 쏟을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생각이라고는 떠오르지 못할 만큼 생산적이고 바쁜 일. 그런 일들은 모든 닥치는 대로 했다.
숨쉴틈 없이 바쁘게 살아가다보니 너와 관련한 기억과감정들은 차차 잊혀 가는 듯했다. 그러나 무의식은 막을 수 없나보다. 너를 지우기 위해 노력했던 5년 동안 너는 몇 번이고 내 꿈에 나왔다. 그리곤 행복하게 웃고, 부서질 듯 껴안고,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꿈에서 깨고 나면 사무치게 슬픈 것도, 네가 보고 싶은 것도 전혀 아닌데 대체 왜 너를 계속 꿈꾸는 걸까. 너를매몰차게 차버린 나에 대한 너의 복수인 건가. 아니면 정말 나도 모르게 너를 그리워하는 건가.
오늘도 너의 꿈을 꿨다.
오늘도 우리는 예전처럼 사랑을 했고 행복해했다.
오늘도 그렇게 너를 잊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