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거운 생활을 기록한다는 것
한때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의 유튜브를 즐겨 봤었다. 하지만 '한국음식 맛있어요'같은 것보다는 그들이 이 사회에서 살면서 취하는 게 뭐고 포기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에 집중했는데, 그들의 말을 듣다 보면 평소에 주변에서 듣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것도 다시 들렸다. 이를테면 '사람이 한 달은 쉬어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고 일도 하죠'라는 말을 너무나 당연하다는 하는 프랑스인을 보면서 저건 너무 당연한데 여기서는 왜 그렇지 않은 거지? 라는 생각을 했다. 한때 프리랜서라고 살고 있던 나 조차도 한 달을 쉬는 일은 지난 몇 년간 전혀 없었다.
좀 이상한 바람이 깃든 생각이겠지만 내가 작가로서 어떤 역할을 갖는다면 그 중 하나는 헐거운, 어중간한, 시시한 것에 대한 기록이나 작업이 아닌가 한다. 다만 이것과 관련된 작업은 이래도 되나 싶게 치열하면 좋겠다는 생각... 막연하게 시시한 것이 더 아름답다 너도나도 아름답다 같은 걸 쓰려는 것은 아니다. 시시한 건 시시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꾸밈없이 시시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동시에 '시시함'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가도 알아야만 한다. 포기한 것 혹은 감당하고 있는 것이 뭔지 알고 누리고 있지만 여전히 의식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나는 헐거운 삶을 한국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살아내는' 혹은 '지켜내는' 것에 가깝다고 느꼈다. 이 오만방자할 정도로 간섭의 시선과 태도가 넘쳐나는 한국사회에서, 그런 삶을 홀가분하게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므로. '내면화당한' 우리는 규격화되지 않은 버팀과 치열함을 스스로도 인정하지 못한 채 그러나 끈덕지게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직접적 압력이나 갈등이 아니더라도 결과물과 '존재가치'가 등치되는 사회적 분위기, 짤막한 적령기와 마감일로 규정된 이 사회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헐거운 삶이란 우유부단함, 무가치함, 무책임함, 안이함을 상기시키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의 트위터에서 '어제 뭐 먹었어'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 중 동성애자인 주인공에게 부모가 '난 내 자식이 이렇게 불성실한 놈인 줄 몰랐다'면서 그가 동성애자임을 '응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비록 이는 보다 독창적으로 감동을 자아내려는 장면 연출의 한 방법으로는 보인다만, 이 장면을 보는 자신은 그게 의아했다고 했다. 나 역시도 나의 한 부분으로서의 동성애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나는 딱히 그렇게 엄청난 농도 짙은 연애를 한 건 같지는 않은데 쓸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을 했던 때가 있는데, 나 자신에게조차 나라는 해석되지 않은 시시함, 어중간함은 '소수성'보다 더 소수적으로 취급되었다.
이해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해가 아닌 방법으로 응시하거나 의식하기, 함께 있는 공간의 분위기를 길게 들이쉬고 길게 내쉬기... 이 긴 호흡을 생물학적 한계로 지켜내지 못할 것을 염려하기라도 하듯 나는 열심히 내 하루의 루틴을 지키려고 한다. 108배를 한다. 달리고 수영한다. 매주 빵을 굽는다. 책을 읽는다. 나의 달리기와 수영은 일정한 수준 이상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다양한 활동들로 버텨보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나 자신에게 증명해보이려고 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학문적 용어들의 애매함 속에서도 나는 그 무미건조한 학술적 용어들 사이에서 어떤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좀더 면밀하고 세분화된 접근과 개념들을 통해 애매함을 견뎌내기.
아직 헐거움을 이해할 수 없는 20대들을 만났을 때의 숨막힘과 부적응(이건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20대부터 헐거움에 눈을 뜬 또래들을 만났던 작법 수업, 백수들의 인문학 세미나 모임 당시의 놀라움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우리는 각자 어디로 가고 있는가, 판단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순간 순간 느끼는 것들을 알아차리고, 또 흘려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