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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자차 Nov 14. 2023

영화 후기 : 당신이 잠든 사이에 (5)

왕자님의 조건


나는 꽃보다 남자 세대다. 동급생이던 가난한 그녀에게 빠진 재벌 고딩이 헬리콥터를 타고 하트 모양의 섬을 보여주는 구준표식 미친 사랑에 충격받은 나는 그 드라마의 OST를 주야장천 불렀었다. 남들은 파리의 연인이라는데, 난 헬리콥터가 충격이었다. 헬리콥터는 재난방송에만 나오는 거잖아..? 사랑은 곧 재해? 아무튼. 그뿐이랴. TV만 틀면 다양한 사랑의 드라마가 내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사랑을 보여주겠다는 듯 아주 열성적이었다. 우리나라 교육열보다도 더 뜨거운 K-러브! 그렇게 나는 유년기 시절부터 찐사랑, 헛사랑, 짭사랑, 막장사랑 및 영화판을 더하면 동성애에 유사연애, 자체적인 로맨스 필터까지 과장 좀 보태서 태어나서 한 일이라곤 아무개씨의 사랑연대기를 본 일밖에 없는 건가 싶을 정도다. 내가 이렇게 사랑에 빠져 살았었나. 사랑에 빠져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주인공들 사이에서 달러와 장부를 숨기고 있는 금고1 혹은 마이크가 있는 화분1 아니면 결정적인 증거를 없애버리는 파쇄기1의 위치를 지키던 내가, 이제는 4차원에 갇혀 머피를 부르던 쿠퍼처럼 “대역죄인, 굴러라” 혹은 “퍼펙트 키스” 같은 줄거리 예언자급의 중독자 수준에 이르렀다.

     

이게 문제인 것이, 이제 로맨스 드라마를 봐도 예전만큼 흥미롭지 않다는 거다. 그 어떤 잘생기고 예쁜 배우가 살랑살랑 나와도 미적지근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차피 혐관이라도 끝은 좋아 죽을 거잖아? 어차피 지금 서로 내외해도 나중엔 찰싹 붙어 다닐 거잖아? 지지고 볶다가 튀겨서 맛탕이라도 만들 거잖아? 명확하고 찬란하게 예상되는 결말은 당기지 않는다. 그러나 K-드라마를 정기적으로 흡혈하며 무럭무럭 자라난 나, K-우먼이 권태기에 지쳐 쓰러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유럽과 미국보다도 큰 사하라 사막에서 길을 잃을 뻔한 내게 수혈해 준 로맨스가 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당신이 잠든 사이에’이다. 왜냐하면 나도 이런 식으로 첫눈에 반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그날도 겨울이었는데, 루시도 겨울이었다니! 운명이 아닐 수 없다. 루시가 피터에게 반한 첫 순간은 뭐랄까, 살다가 키 크고 웃는 모습이 멋진 ‘잘생긴’ 남자를 보면 당연히 생기는 일 같다고나 할까. 나는 NF이므로 매우 매우 가능하다. 아마 루시도 NF였을 것이다. 그렇게 루시는 내 취향과는 정반대인 피터에게 푹 빠졌고, 그와 마주하길 고대하다가 크리스마스에 건넨 그의 인사에 ‘왉앍’이라는 답을 했다. 동공이 흔들리는 나와 같은 마음인 루시가 착착 치는 제 이마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와중, 파워 J인 하늘은 당황했을 거다. 루시는 피터에게 할 말도 다 준비했고, 그들은 매일 아침 8시에 만나고, 그날은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이다. 하늘도 그 완벽한 무대에 루시가 그런 이상한 답을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하늘은 결단을 내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비한 베베 꼬인 솔로 양아치를 작동시킨 것이다. 피터가 선로에 떨어지고 루시가 피터를 구한 순간, 하늘은 성과 달성한 기념으로 샴페인이라도 땄을까. 오, 하늘이시여. 그런데 왜 잭이라는 잘생긴 동생을 설정해두셨나요.

     

영화를 다 보고 나니 하늘이 정한 운명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터였을까 아니면 잭이었을까. 운명을 대하는 태도는 루시, 잭, 피터 모두가 다른데도 이어지는 사람이 있어서 참 신기했다. 나는 같은 운명론을 믿고 행하는 사람들이 이어지는 줄 알았는데, 누군가가 공을 던지고 그걸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공을 던진 사람은 루시였다. 루시가 이 모든 운명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여태까지 루시의 인생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처럼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였다. 어릴 적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대학에 들어갔더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렇게 졸업도 못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고. 루시의 삶은 어느 평범한 누군가는 그저 기본적으로 주어질 조건과는 거리가 있다. 가본 적도 없는 피렌체에 가겠다고 여권을 만들 정도로 낭만적인 루시에게 이런 불안한 상황과 적성에 안 맞는 직장은 족쇄와도 같았을 것이다. 가족도 주변 사람들도 자신을 떠나고, 직장마저도 늘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뿐. 루시의 삶 전부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나만 가족이 없다는 그 자조적인 말에 숨겨진 깊은 외로움은 꼭 안아주고 싶었다. 매일매일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스쳐 지나가는데, 꼭 그 모양새가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아 보일 때가 있다. 나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대로 휩쓸려갈 것 같아서 어떤 날은 지하철 손잡이를 꼭 잡고 구두에 숨겨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힘을 줬었다. 휩쓸리지 않으려고, 내 자리를 잘 지키고 서 있으려고.

     

우연히 보게 된 피터는 루시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현실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적어도 부표 같던 자신이 잠시라도 머무르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어떤 바위 같지 않았을까. 내 머릿속에 사는 나만의 의자, 나만의 침대, 나만의 집 같은 것.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평소처럼 지하철을 타고 직장에 출근하는데 이상하게 역마다 정차하는 지하철이 괜히 좋은 거다. 별생각 없이 지나쳤던 그 정류장에 매번 꼬박꼬박 멈추는 그 지하철이 얼마나 좋던지. 그때 한참 내가 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괴로웠던 때였는데, 지하철이 멈출 때마다 고개를 들어 역 이름을 보니까 그 복잡한 생각이 잠시라도 멈췄었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닌데, 심해로 치닫는 잠수부를 한 번씩 멈추게 하는 기분이랄까. 내리막길을 가던 자동차에 자꾸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조절하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나도 견디는 힘이 생기고,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실패했네, 음 원인이 뭐지, 그렇다면 다음엔 이런 보완책으로. 아마 루시에게 피터란 존재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늘 똑같은 일상, 그냥 가버리는 세월, 적어도 피터라는 걸림돌이 있으면 아래를 향하는 시선을 들어 올릴 수 있었을 테니까.

     

그에 반해 잭은 좀 재밌다. 첫만남부터 자신의 이상형 그 자체인 루시에게 반했고, 루시가 형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어 의심했다. 형의 약혼녀라서 좋다는 말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놓치는 건 싫고. 빙판 위에서 바지까지 찢어먹었는데! 하지만 우리 잭은 연애 경험이 별로 없는지 삐딱하고 까칠하게만 굴면서 루시의 호감과 반감을 동시에 샀다. 중간에 잠든 형이랑 카드게임을 무슨 원맨쇼처럼 하는 걸 봤는데, 하아. 그런데 이런 경우 가끔 있지 않나. 내게도 그런 기회가 좀 있긴 했다. 학사학위를 만들고 나서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었다. 나는 고민했다. 이걸 한 번 해봐, 말아. 그 당시 학사학위를 취득한 후였고, 동시에 동생의 입시가 시작되었다. 어릴 적부터 집 사정을 좀 알고 있어서 몇 번 왔던 기회를 포기했었다. 가장 돈이 적게 드는 것이 공부였기에 나는 부족한 머리로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이렇게 바보라는 것을 매일 느끼는 건 좀 우울했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해보고 싶다는 말을 나는 왜 못했을까. 집안 사정도 있었는데, 겁도 났다. 나는 이미 입시에 실패해 도전하는 게 너무 두려웠었다. 학위를 따고서도 그랬냐고? 그랬다. 벌벌 떨던 마음은 가끔 삐죽이며 고개를 내밀었고, 나는 다시 그것을 집어넣고 연필을 들었다. 네가 재능이 있었으면 벌써 됐겠지, 나는 원래 그거 안 좋아해, 내숭 떨면서. 그렇지만 뭐든 억지스러운 건 결과가 안 좋다. 그때 손을 내민 것은 영화와 드라마였다. 신기하지. 어떤 것을 보면 마음에 무언가가 차올랐다. 꿈에서 본 그 사람처럼 내가 무어라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늘 문을 두드리고 짖어대는 윗집의 강아지처럼 내 갈비뼈를 쿵쿵 때렸다. 어떤 날은 옭아 죄듯 아팠고, 어떤 날은 태양이 들어왔고, 어떤 날은 마르지 않는 물처럼 펑펑 솟았다. 답답하다는 듯 나를 꺼내달라는 듯 내게 자꾸만 말을 걸었다. 그래서 나는 영화와 드라마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자기 위에 손을 올렸다.

     

내게 잭은 드라마고, 영화고, 글이었다. 글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으니까. 아무튼 나는 잭에게 푹 빠졌고, 지금도 그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내게 영화와 드라마는 감독과 작가와 배우가 빠짐없이 설계해 놓은 미로 같은 것이고, 보물을 찾는 지도다.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어떻게 표현했는지 분석하고 싶다. 안타깝게도 내겐 두 가지 능력 모두 없지만, 나는 그 미로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나만의 방법을 찾고 있다. 바로 내가 만든 나침판을 통해서!

     

내가 만든 나침판은 방위 표시가 없다. 시간도 없다. 공간도 없지. 오버를 좀 하자면 시공간을 넘어선 물건이라 그렇다. 시공간에 제약을 안 받는 나침판이 따르는 유일한 방향은 바로 나 자신이다. 미로에 들어가 나침판을 앞에 두면, 어느 방향을 향해 빙그르르 돌아가기 시작한다. 물론 가다 보면 길이 막힐 때도 있다. 생뚱맞은 길이 나올 때도 있고 뜨악한 곳일 때도 있다. 그럴수록 어릴 적 유치원에서 모형 배 위에 올라타 모래 바다를 지휘하던 선장처럼, 옥수수밭과 배추 더미에서 장화를 신고 자연을 탐구했던 것처럼, 공원의 호수와 펼쳐진 전 세계의 국기 밑에서 얼음 땡 놀이하던 그때처럼 나는 길을 찾아가면 된다. 언제나 레벨이 부족한 모험가라도 이 모험 놀이가 재밌는 것은 어쩌면 나의 원초적인 본능 혹은 인간의 원초적인 마음이 아닐까. 아주 옛날에 우린 하늘과 태양과 저 멀리 나무와 산을 보며 길을 걸어왔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피터의 삶도 아름다우리라 생각한다.

     

피터는 병실 이전을 앞두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베스킨라빈스 민트퍼지맛을 먹으며 굉장히 인상 깊은 말을 남겼다. “모든 걸 당장 알 필요는 없다. 평생을 걸 수 있다. 정말로 말이 안 되지만.” 민트가 톡 쏘는 알싸함을 피터만이 아닌 내게도 주었다. 루시와 잭을 거쳐서 지금은 피터의 말대로 살아가려는 중이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 내 마음의 부표가 탁 걸렸다. 인연이란 그런 것이라지. 그저 다름없는 날인데, 이상하게 탁 걸리는 날이라고. 늘 느끼는 나의 불안감과 우울감에 거는 브레이크, 그 지하철역들. 정말 쓸데없이 걱정이 많고 전전긍긍하는 나한테 피터가 민트퍼지를 건넨다. 나는 민트를 좋아하진 않지만, 초코는 좋아한다. 피터는 정말 용감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민트퍼지를 그리웠다며 맛있게 먹으니까!!

     

그러니 어떻게 피터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지. 아마 나였다면 이런 이유로 피터를 선택했을 것이다. 내 마음의 부표가 피터에게 탁 걸려버렸으니까. 놓쳐버린 기회, 후회되는 과거, 해야 할 일이 있는 오늘, 어떨지 모르겠을 내일까지, 나는 계속해서 물 위를 끊임없이 떠다니고 있다. 물길은 아주 좁아져서 내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태평양 바다처럼 넓어서 흘러가는 건지 아니면 멈춘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잠시 쉬어가고 싶은데 손이 닿지 않을 때도 있고, 물살이 너무 빨라 두려울 때도 있다. 어떤 날은 하늘이 아닌 물속을 보고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다 괜찮다는 것을 몸소 깨닫는 중이다.

     

동이 트기 전 공원에서 걷고 뛰고를 반복하면, 토끼도 까치도 몸을 움직이고 있다. 그걸 보면 느낀다. 물 위의 부표를 흘러가게 하는 건 온전히 내 몫이다. 토끼의 하루가 시작되는 것도 온전히 토끼의 몫이고, 까치의 아침도 온전히 까치의 몫이다. 내 몫을 하기 위해 아침에 움직이면, 나는 물 위의 부표가 아닌 광활한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다. 내면의 심연을 탐험하는 잠수함이고,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는 철새다. 태양이 뜨는 동쪽이고, 세상의 끝이 없는 모험가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망원경이 아니라, 참으로 잘 보낸 오늘 하루다. 그 하루가 모이면 굉장한 항해일지가 된다고, 피터가 말한다.

     

이제보니 감독이 왜 캘러한 가족에게 잭과 피터를 넣어놨는지 이해가 간다. 그리고 왜 하필 루시가 피터에게 빠졌다가 잭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알 것 같다. 루시, 너는 망망대해에서 너의 항구를 찾았고, 잠시 닻을 내릴 곳을 찾았고, 그곳에서 지난 날을 되돌아보고 휴식을 취하고 다시 모험을 떠날 용기를 얻겠구나. 그렇게 동쪽의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닻을 올리고 바람을 타고 너만의 나침판을 들고 노를 젓겠구나. 너를 본 나도 그렇게 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구나. 사울씨도 따뜻하게 받아준 캘러한 가족이 우리에게도 있구나. 캘러한 가족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도 될 수 있고 눈에 보이지 않은 어떤 것도 될 수 있구나.

     

그래서 루시와 잭과 피터는 함께인 것이다. 루시 혼자 가는 피렌체, 잭과 함께 가는 피렌체, 피터와 함께 가는 피렌체. 그 어떤 피렌체도 네가 생각하기에 따라서 달린 것이라고. 피렌체엔 이미 도착했을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곳은 네 마음과 같은 곳일 거라고.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스럽고 엉뚱하고 즐겁고 따뜻한 캘러한 가족이니까.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글을 쓰면서 나의 캘러한 가족을 찾을 것이다. 아마 이 글을 보는 사람들도 자신만의 캘러한 가족을 찾겠지? 그럼 당신이 잠든 사이에, 어느새 우리는 왕자가 되어있을 테니.

     

아, 그러고 보니 한다던 얘기를 까먹었다. 그 첫눈에 반한 남자! 키가 아주 크고 팔다리가 길었던 그 모델 같던 그 남자! 쓰면서 알게 된 건데, 그 남자를 소개하기에 딱 맞는 드라마를 왠지 찾은 것 같다. 음, 그건 다음 시간에. 혹시 다시 보게 된다면 쓸 이야기가 더 많을 테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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