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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aleopard Jul 04. 2024

남녀 투샷의 몇 가지 양태


박찬욱, 「헤어질 결심」2022

       정훈희와 송창식이 부른 안개가 헤어질 결심의 영상 위로 흐른다. 이 영화에서는 중국 여자와 한국 경찰이 사랑에 빠진다. 박찬욱의 영화를 보면 자꾸만 일본을 떠올리게 된다. 일본이 중국을 깊이 능욕하던 시절 스파이로 활약했던 탕웨이는 조선 땅에서, 일제 시절이었다고 하더라도 성공했을 것이 틀림 없는, 유능을 넘어서 기계가 아닐까 의심스러운 경찰과, 여기서도 사랑과 사랑 아닌 것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전작인 <아가씨>는, 반도인이 내지인보다 일본 영화를 잘 만든다는 것을 증명했다. 일본 영화라는 게 일본말 좀 들어가고 배경이 근사하게 일본적이라고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녹명관鹿鳴館>이 카게야마 백작의 권모술수에 의해 그 아내 아사코가 짓밟히는 허무하고 아름다운 연회를 그려냈다면 박찬욱은 하녀와 아가씨의 권모술수에 의해 백작 호소인과 백작들이 짓밟히는 복수극을 그려냈다. 카게야마와 아사코는 승리하거나 패배했지만 남아서 지켜야 할 자리가 있었다. 그것이 내지의 운명이었을 것이다. 반면 반도인들은 사랑과 진리와 행복을 제외한 그 어떤 것에도 책임을 지지 않고 먼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이것이 미시마의 허무와 박찬욱의 충실함을 갈라지게 했다. 잠깐, <아가씨>가 충실? 오히려 두 여인의 정사 장면에서 느껴지는, (미시마가 공들여 세심한 손길로 가꿔낸 공허에 비해 한없이 더 황폐한) 공허가 문제가 된다. 그것은 박찬욱 자신의 공허이며, 박찬욱이 대표하는 반도인의 공허이며, 스스로가 충실하다고 자부하는 자의 공허다. 승리하고 득의양양해하는 두 여인의 천진난만함은 오늘날 내지에 대한 반도의, 아시아주의에 대한 세계주의의, 헤테로에 대한 LGBT의 역사적 승리를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물론 박찬욱의 주인공들은 귀족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저런 '단순한' 구도와 자기 자신들을 차별화할 수 있다). 이 구도가 친일을 넘어 일본인의 영화에 접근하려는 이 영화의 욕망을 안전하게 보호해준다. 그러나 모든 대결의 표상은 적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그리는가에 그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 여성주의가 자신에게 부여된 커다란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가장 큰 이유도 자신들의 적에 대한 유용한 이해를 제공해줄 수 있는 방식으로 담론을 구축하는 것이 그들에게 여러 가지 이유에서 곤란하기 때문이다. 반도의 고층(무의식이라고 해도 좋다)에 깔려 있는 일본을 발굴해서 빛 아래 드러내는 것, 반도인들은 여기에서 출발할 때 시행착오를 덜 겪을 수 있다. <아가씨>는 내지가 변태성욕자라며 조소하고 <헤어질 결심>은 내지를 다루는 일을 방기해버린다. 내지를 모르면 반도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영화란 개인들의 세계라고 믿는 박찬욱이 반도론이나 내지론을 다루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는 남북관계론으로 출세한 사람이다. '안개'라는 뽕짝 노래를 '전유'하는 것은 반도의 핵심적인 제국 전통 하나를 '전유'하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반도론과 내지론에 개입하는 것이다. <올드보이> 이후 박찬욱 영화의 진정한 문제는 그가 언제나 아시아를 전유하여 자신의 미시마-하루키-니체 식 귀족주의를 설파하는 데 동원했다는 점에 있다. 아시아의 유민이나 다름 없는 유대인들을 니체는 증오하고 경멸했다. 그러나 니체야말로 (알프스 산중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아시아의 야만적인 오물 속을 구르면서 혼이 좀 났어야 하는 사람이다. 박찬욱의 동생은 <귀신, 간첩, 할머니>라는 책을 내기도 한, 아시아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한 전문가다. 박찬욱은 아시아를 간파할 수 있는 식견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순화하고 '근대화'하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붉은 돼지紅の豚」2003


    2015년, 처음 규슈에 가서 한달살이를 했을 때, 규슈갓켄토시 역 앞 허허벌판에서 생활했다. 신도시처럼 완전히 새로 지은 맨션들과 논밭,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주유소나 안경점 같은 것들이 인상적인 따뜻한 1월의 규슈. 숙소 바로 근처에 이온 쇼핑몰이 있었다. 한국의 대형마트 같은 것인데, 그 안에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입점해 있었다. 사람들이 많지도 않고, 조용한데 건물만 커다란 마트 안에, 기묘할 정도로 세련되지만 아주 저렴한, 한 끼 식사 리조또를 7~8천원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가성비 식당이었다. 그 레스토랑에 들어가자마자 붉은 돼지가 생각났다. 그 OST와 함께. 

    그 식당도 저 영화처럼 어딘가 모를 '동양의 슬픔'이 느껴졌다. 이탈리아 어느 항구 마을이 배경일 것 같지만, 실은 저런 슬픔의 질감은 동양인이 아니면 그려낼 수 없다고, 저 표현을 좋아했던 저우쭤런이라면 말했을 것이다. 자세히 보면 정말 이탈리아가 아니다. 이탈리아에는 저런 마을이 없다. 저 소녀도 머리는 빨간색이지만 일본인이다. 의자와 테이블의 디자인, 테이블 간의 거리, 테이블의 크기, 가운데 놓인 화분, 결정적으로 소녀는 남자를 바라보고 남자는 먼 바다를 바라보는 저 구도, 하나하나라면 유럽에서도 발견할 수 있겠지만, 저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 없이 동시에 갖추고 있는 장소는 다름 아닌 일본이라는 사실을, 나는 그때 규슈에서 직감했다. 그 식당도 애니메이션의 배경음악처럼 다정하고 적막하고 우아하면서도 냉정하고 그러면서도 아련한 향수 같은 것이 감도는 공간이었다. 

    소녀의 표정이 지닌 담담하면서도 다정한 쓸쓸함. 카뮈를 바라보는 알제리의 프랑스 소녀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지금 내 뇌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전부 유럽 전후 영화에서나 보던 이미지들이다. 거기서 햇살은 더욱 가혹하고, 남자와 여자들은 공허의 무게에 굳어 있다. 그들은 무심할 수 없다. 무심한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고뇌의 이유가 된다(이방인). 그들에게는 환희가 있고, 작열하는 고통이 있고, 그 환희와 고통을 관조하는 이성의 도도한 장려함이 있지만, 저처럼 담백하고 쓸쓸한 슬픔은 없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도 저런 사람들, 저런 풍경이 있었던 것일까. 웬디라면 모험이 끝나고 한 순간 피터팬을 저런 표정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역시 나는 저우쭤런보다는 오카쿠라에 마음이 간다. '동양의 슬픔'도 원래는 유럽의 것이었고, 그 유럽의 것도 원래는 동양의 것이었으니 '아시아는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인도적인 것이 인도에는 자취가 없고 일본에는 남아 있는 것처럼, 19세기의 구미라는 것도 구미에서 다 사라졌지만 끝끝내 일본에는 남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채플린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먼저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어 타임 인 아메리카 이야기를 하자.


세르지오 레오네Sergio Leone,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You dancing? You asking? I'm asking. I'm dancing. 

    Once Upon a Time in America에서 어린 시절의 동업자인 두 남녀는 전전의 Friend Zone을 체험한다. 거기에는 아쉬움도 있고, 허탈함도 있고, 폭력도 뒤따르는데(누들스가 나중에 강간한다), 여기에 열심히 살아가는 남자가 있을 뿐, 형이상학적인 무게는 표현되지도 않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여자는 열심히 살아가는지 아닌지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브리보다 훨씬 남성중심주의적이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에 더 가깝지만, 차라리 48년에 비토리아 데 시카가 찍은 자전거도둑이 이 점에서 더 '인간적으로' 나아보이는 것은 시대적 상황의 차이도 있다. 48년 이탈리아에서 여자란 이에모토를 위해 남편과 함께 분투하는 존재였을 뿐, 로맨스도 그 무엇도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엔 그 시절의 사회주의적 분위기도 작용한다. 반면 84년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누들스는 자본주의 일변도 사회에서 여성 지위의 향상(혹은 여성들에게 '잘 해주기' 위해 새로운 상품들이 잔뜩 등장한 시대 풍조)에 다소간 적응하지 못하는 듯하다. 누들스에게 있어 비토리아 감독의 영화 속 가장처럼 간단한 장난만으로 아내와 아이와 인간적 애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순간은 '좋았던 옛날', 젊었던 자신들이 치기 어린 범죄를 저지르던 시절에 불과하다. 이제 '어른이 된' 그는 뭔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좋아하던 여자와 잘 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시도 자체가 사실은 불편해서 견디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이야기를 추한 파국으로 이끈다. 그 추한 파국이야말로 열심히 사는 남자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것이 영화의 주제다. 이 영화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면 이 영화의 병적인 추함은 우리들 자신의 사회가 지니고 있는 병적인 추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누들스의 저 표정을 보라. 인스타에 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여자들이 인스타 감성을 식당을 좋아한다는 사회 풍조 때문에 억지로 근사한 식당에 데려와놓고, 평소에 입지도 않는 단정한 옷까지 입고, 불편해 죽겠는데 여자하고 얘기도 잘 안 되니까 기분이 몹시 안 좋은 우리네 남정네들의 오늘날 모습이 저것과 그렇게까지 다르겠는가. 슬프고, 답답하고, 불편하고, 웃긴 처량함.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자전거도둑 Ladri di biciclette」(1948)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힘든 전후 이탈리아에서 남편은 포스터 붙이는 일을 구하지만 자전거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다. 둘은 자살하네 마네 부부 싸움을 하고 바로 이불을 전당포에 맡기러 왔다. 생각보다 값을 많이 쳐줘서 두 사람의 얼굴에 안도가 스친다. 저것이 누들스가 어려서 겪었을, 그리고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오랫동안 기대해온 남녀 관계의 모습이다. 물론 1920년대 미국은 너무 '잘 살았기' 때문에 누들스는 자신의 여자와 함께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인간극장  「나의 소중한 당신」편 (2009)

    함께 어묵장사를 하는 부부가 비가 온다는 뉴스를 보며 걱정하기도 하고, 서로 도와주겠다며 꽁냥꽁냥하기도 한다. 이렇게 가업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남녀에게는 '네오 리얼리즘'이 담고 싶어했던 나름의 로맨스가 있다. 그들의 걱정도, 안도도, 미소도, 진정으로 클로즈업에 값한다. 근사한 카페도, 담백하고 쓸쓸한 슬픔도 필요 없고, 우아하고 아기자기한 디자인의 인테리어도 필요 없다. 호숫가 별장도 필요 없고 라이브 음악을 연주해주는 오케스트라도 필요 없다. 드레스도 양복도 필요 없고, 그저 두 얼굴, 두 표정, 풍기인삼사와 목장갑과 아이 교육용으로 붙어 있는 브로마이드만 있으면 된다.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지만 누구보다 끈끈히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요즘엔 이렇게 부부가 사이좋게 가업을 위해 진력하는 이미지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매력을 잃은 것일까? 설득력을 잃은 것일까? 사실 저런 '리얼리즘'의 묘미는 니체주의(낭만주의)를 철저히 무시하고 무화시킨다는 데 있다. 그리고, 니체주의야말로 우리 시대 매력과 설득력의 가장 커다란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관객들은 올바르게 열심히 땀 흘리며 사는 부부의 떳떳하고 아름다운 모습보다 호걸과 음녀의 이야기, 박해일과 탕웨이를 더 좋아하고, 호걸과 음녀가 기이하게 엮이면 엮일수록 더 좋아한다. 정正보다 기奇를 좋아하는 것이다.


지아장커贾樟柯, 「강호아녀江湖儿女」(2018)


    음녀는 나오지 않고 호걸과 호걸이 나오는 이 영화도 역시 열심히 살아가는 연인들의 이야기이지만 그것만은 아니며, 강호에서 펼쳐지는 중국식 낭만주의가 감독의 장기인 리얼리즘과 불꽃을 튀기며 나름대로 강렬한 텐션을 자아낸다. 조직의 두목인 남자를 위해 여자는 총을 쏘고 감옥에서 썩지만 남자는 새 여인을 만난다. 여자는 혼자 조직의 옛 동료들과 잘 살지만 남자는 사업에 실패하고 하반신 마비가 되는데 여자는 남자를 다시 의리로 감싸 안는다. 강호에서 의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있는가, 라는 여자의 대사는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매력적이다. 붉은 돼지에서 "돌아갈 수 없는 나날들"이라고 OST 제목은 그렇게 붙였지만 사실 끊임없이 그날들로 돌아가고 있다면,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강호는 변함없이 강호"라고 말하지만, 사실 '한 번 떠난 황학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 않지만 그것은 네오리얼리즘에서처럼 가업에 열심히 땀 흘리느라 그런 것이 아니라, 강호라는, 천하에 대응되는, 한자문화권 특유의 유장한 시공간을 바라보느라 그런 것이다. 강호란 박찬욱이 그리는 어딘가 모르게 귀기가 느껴지는, 내지인이 본 반도와도 다르고, 하야오가 그리는 이탈리아 같은 일본의 항구도시와도 다르며, 세르지오 레오네가 그리는 미국식 인스타 감성의 황폐한 호숫가 레스토랑과도 다르다. 당연히 그 풍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눈빛도 같을 수가 없다. 

    이제 마지막으로 농담에 대해 이야기하자. 리얼리즘에도 낭만주의에도 없는, 우리를 웃겨주는 것을 제 일의적인 우선순위로 두는 이 특이한 장르성은 그 고유한 동적인 성격 때문에 스틸 사진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기타노 다케시北野武, 「하나비花火」(1997)


    그럼에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는 유머와 폭력으로 유명하다. 카메라와 인물들 사이의 거리감은 묘하다. 네오리얼리즘의 클로즈업과 멀리서 바라보는 낭만주의, 그 사이에 있다. 물론 물리적인 거리로만 따지면 <하나비>의 저 마지막 장면이 세르지오 레오네나 지아장커나 하야오의 장면들보다 더 멀리서 찍은 것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가까워보이는 것이다. 평론가들이 '만화 같다'고 표현하는 특유의 구도와 배경과 시선처리 때문일 것이다. 배경에 집착하는 하야오와 달리 기타노의 배경들은 단순 그 자체로, 관객 입장에서 천천히 음미할 만한 점이 전혀 없이 보자마자 깔끔하게 처리해버릴 수 있는 정보다. 인물들과 배경 사이의 거리가 없는 것이고, 그로부터 배경이 자아내는 깊이감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은 멀리서 감상할 수 없으며, 가까이서 배우들의 액션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그것은 영화의 흐름에서도 자연스러운데 기타노의 영화에서 배우들은 끊임없이 개그를 치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하는 두 가지 중의 하나를 반드시 하기 때문이다. 저 마지막 장면에서도, 관객은 바로 다음 장면에서 두 사람이 폭력을 저지를지 코미디를 저지를지 알 수 없다. 그 알 수 없는 것이 자아내는 묘한 긴장감을 기타노는 잘 다룬다. 기타노 영화의 매력은 두 사람이 연인이나 부부라는 데서 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코미디냐 폭력이냐가 끊임없이 들이밀어지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좋은 구도와 시선처리와 연기와 거리를 두고 잘 찍히기만 한다면 인물들의 서사는 부차적이며, 실제로 하나비는 그런 잘 찍은 시퀀스를 이어 붙인 미술 전시 같은 영화다. 하나비는 확실히 사랑 영화이기는 하다. 죽을 병에 걸린 아내를 위해 형사가 은행을 털어가면서까지 마지막 여행을 시켜주고, 경찰에 쫓기다 쫓기다 마지막으로 바다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는 비련의 이야기다. 하지만 특히 기타노의 저 표정은, 웃기려는 표정처럼 보이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죽을 지 모르는, 죽일 지 모르는 표정 같기도 하지만, 사랑의 아련함, 애틋함, 안타까움, 알뜰살뜰함, 희노애락, 그런 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언제나 '다른 생각'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이 코미디언으로서 그의 능력이다. (그리고 코미디 영화는 언제나 코미디언의 개인적 능력에 크게 의존하는 게 아닐까?) 코미디언은 남을 놀래켜야 한다. 의표를 찔러야 웃는 것이다. 코미디는 관객이 예측할 수 없어야 한다. 뻔하면 웃지 않는다. 네오리얼리즘이야 원래 뻔한 것이고, 뻔하면서도 좋은 것이니 정말 그게 무서운 거다. 매일 먹는 천원의 식단 같은 것이다. 살다보면 이것저것 온갖 식단을 시도해볼 수 있겠지만 결국 학관에서 먹는 천원의 식단이 제일 좋다는 걸 알게 되는 그런 느낌이다. 낭만주의의 기이함은 한계가 있다. 기이함은 단맛처럼(설령 카카오 비율이 높은 쓰디쓴 단맛이더라도) 우리를 향락하게 한다. 코미디는 음식을 먹다가 뭐가 나온 것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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