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지나가지 않고, 미래는 벌써 와 있다

영화 컨택트(arrival), 2017

by 미르mihr


가끔 세상에 빚진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특히 좋은 영화를 보고 난 뒤도 그렇다. 그저 '좋다'는 말과 느낌으로 끝내버리지 않고 그 좋은 영화들에 대하여 언젠가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오랫동안 생각만 했었다. 이곳에서나마, 내게 감명을 준 인상적인 몇몇 장면들에 대해서 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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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본 건 꽤 오래전인데도 여전히 때때로 떠오르는 장면은, 외계인의 동그라미 모양 언어를 해독하던 언어학자가 동시에 자신의 미래 모습의 환영(幻影)을 보는 모습이다. 다시 보니, 영화는 시작부터 우리에게 게 이런 말을 건네고 있었다.


"우리는 너무 시간에 매여 있어, 그 순서에..."


철학자들은,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라고 말한다. 그게 정말이라면 언어가 다르면 사유의 방식이 다르고, 다른 새로운 언어를 배우게 되면 다른 사유의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 외계인의 언어는 표의 문자(도형문자)로, 언어의 뜻과 소리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가만히 따지고 보면, 한자어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언어도 실상 그렇지 않을까? 예컨대 '사과'라는 글자가 가리키는 것을 실물 '사과'라 여기는 건 우리의 습관일 뿐, '사과'라는 소리와 '사과'라는 실물은 실상 아무 상관이 없다.


더 중요한 건, 외계인의 도형문자의 문법에는 시제가 없다. 우리는 과거-현재-미래의 시제가 있고, 영어나 프랑스어에는 더 복잡한 시제가 있다. 시제의 문법 언어는 시간을 순서적으로 사유하도록 강요한다. 그런데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게 정말일까? 시간적 인과 관계라는 게 정말로 있는 것일까? 세계의 모든 일은 동시적인데, 인간의 인식이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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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들이 언어학자를 통해 낯선 외계인에게 묻고 싶은 건 이 한마디였다.


"당신들이 여기에 온 목적이 뭡니까?"


이 하나의 질문을 이해시키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린다고? 군인들은 의아했지만, 따지고 보면 한 달 만에 그런 일을 해낸다는 건 기적이 아닐까? 예컨대, 우리는 갖태어난 아기에게 혹은 반려견에게는 이런 질문을 이해시킬 수 없을 것이다. 질문을 이해시키려면 언어에 대한 이해 이전에, 우선 상대방이 나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인지, 의도를 갖고 행위하는 존 재인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그렇게 시간을 들여 간단한 단어들로부터 의사소통을 시도한 뒤, 우여곡절 끝에 그들에게 들은 대답은 이랬다.


"무기를 주다 offer weapon"


그런데 이게 과연 무슨 뜻이란 말인가? 우리말 '무기'만 해도 그렇다. '무기를 들고 싸우다'와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의 무기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무기'를 사물을 가리키는 말로 알아들은 군인들은 전투를 준비한다. 그러나 그들의 무기는 전략적 강점, 즉 인류의 미래를 볼 수 있는 선물을 뜻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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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믿고 선물을 알아본 언어학자 덕분에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는 언어학자 옆에서, 단순한 몇 가지 단어 형태에서 전체 언어-단어를 추론하고 계산할 수 있는 수리물리학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생 별만 바라봤다던 그는, 위험할지도 모르는 에일리언 앞에서 용감하게 방호복을 벗어던지고 진솔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언어학자에게 반했다. 그가 그런 사실을 고백하려 할 때, 언어학자는 묻는다.


"당신의 전 생애를 다 볼 수 있다면, 삶을 바꾸겠어요?"


왜냐하면 언어학자는, 시제가 없는 외계어를 배워가면서부터 이미 그가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리라는 것을, 그와 결혼해서 아이를 얻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의 아이가 희귀병에 걸려 너무 일찍 죽음에 이르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들의 사랑도 파국에 이르리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수학자 대신, 언어학자는 스스로에게 대답하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아니 어쩌면, 만약 시간에 순서가 없다면, 언어학자는 언젠가 이미 그의 사랑을 받아들였으며 이미 아이를 만났고 또 떠나보냈으며, 단지 지금 고백을 받는 이 순간을 다시 맞이했을 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덧. 영화의 시작과 끝에, 마치 영원 회귀마냥 삽입된 막스 리히터의 음악(on the nature of daylight)

https://youtu.be/b_YHE4Sx-08?si=qeBWoyYgk7fNzB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