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인의 녹스 Ⅵ ― 사랑의 조건〉

그 조건이 이별의 사유가 되버리다.

by Y GUASI


남자와 여자는 조건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조건은, 인생이 흔들릴 때마다
결국 이별의 사유가 되어버린다.




에린은 몸이 좋지 않아 병가를 냈다.
사무실 한쪽에서 직원들이 웅성거렸다.

“팀장님, 이 영상 보셨어요?”
“뉴라비스요… 와, 비온 대리님 이제 사모님 되시나 봐요. 너무 부럽다.”

루인은 아무 말 없이 모니터를 켰다.
화면 속 비온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마주 앉은 채로.

NEURAVIS (뉴라비스)

Neura + Vis(vision) — ‘신경의 시야’,
인간의 뇌를 새로운 시선으로 본다는 뜻.
“비온과 제이미는 실리콘밸리 신경과학 스타트업 NEURAVIS의 공동 창업자다.
그들은 ‘기억·감정·뇌파’를 기반으로 한 정서 복원 기술을 개발하며,
인간이 상처를 넘어 회복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있다.”


“두 분은 어떻게 이렇게 오래 함께

일할 수 있나요?”

비온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웃었다.


“신뢰인 것 같아요.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믿는… 그런 편안함요.

떨어져 있어도 불안하지 않았어요.

따로, 그리고 함께…

그런 느낌이랄까요.말이 어렵나요?”



그 말에 제이미가 미소 지었고,
비온도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루인은 끝내 화면을 덮은 채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숨을 참았다.
꾹꾹 눌렀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숨이 막혔다.

정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옥상에 올라 도시 불빛 아래를 내려다본다.
모든 게 흐릿하다.



감정을 드러내면 통제할 수 없다고 믿었던

지난날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되감기듯 재생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되돌릴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되돌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참으며 버티는 게 살아가는 일이라 믿었던 시간들.
그 시간 속에서 그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 그러게, 또다시 무너지고

방법을 잃은 채, 행동도 멈춰버렸어.)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속은 타들어가듯 쓰라렸다.

쥐어뜯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비온…”




잊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루인에게 각인된 존재였다.
평생, 지워지지 않는 루프처럼
반복되고 또 반복될 기억으로,
감정으로 남아 있었다...





그 시각, 에린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억지로라도 죽 한 숟가락을 떠 삼켰다.

한 손은 배를 감싸 쥔 채였다.

식탁 위엔 아기 초음파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이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기를 위해 마음을 다잡아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불안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루인이… 좋아할까?

낳지 말라 하면… 어쩌지?




“아니… 아직 끝나진 않았어.”

에린은 자신에게 속삭였다.


“이렇게 끝낼 순 없어.

되돌릴 수 있을 거야.

다시,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루인의 냉기,
자신에게는 감정이 없다는 사실.

아이로라도 그 사랑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루인은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제야 에린은 깨달았다.

“사랑받지 않는 헌신은,
결국 자신을 말려 죽이는 일.”


감정이 닿지 않는 사랑은
결국 모래 위의 집이었다.




‘그냥 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났더라면…’
‘그랬다면 이렇게 비참하진 않았겠지…’

그녀는 잠시 웃었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그녀는 다시 죽 한 숟가락을 입에 넣는다.
천천히,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랑이란, 결국 감정의 온도로만 남는 것.
너무 차가우면 얼어 죽고,
너무 뜨거우면 타 죽는다.

그 온도를 잃은 사람들은
평생 서로의 계절을 찾아 헤맨다.






비온은 먼 도시의 불빛 아래,
조용히 떠났다.

루인이 만든 구조는
사랑이 있더라도 그녀에게 허용되지 않는

틀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존중을 남기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듯,
조용히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 안녕.”


이게 바로 안정형의 사랑 방식이다.
자신이 준 감정을 소중히 다루지 않는다면
그들은 주저 없이 사랑을 거둔다.

나의 감정이 소중한 만큼,
상대의 감정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
그래서 안정형은
서로의 온도를 맞추며 살아간다.


감정은 사랑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다.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도,
다시 세울 수도 있는 힘의 원천이다.

반대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감정이 사라지면 관계는 공허해진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
그저 그렇게 하루를 버텨가는 삶.

남녀 사이는
오직 감정으로 연결된,
가장 인간적인 관계일 뿐이다.
그래서
조건이 주체가 되어버리면,
인생에서 위기가 닥쳐올 때
버틸 끈이 없어, 이별도 쉽게 찾아온다.



조명이 천천히 꺼지고,
화면엔 한 줄 자막이 뜬다.

〈루인의 녹스〉 — END


© Y.GUASI | Record&Narrative





이미지는 작가가 서사의 감정 톤에 맞춰 직접 연출·생성한 시각화입니다.
실제 인물 및 사건과는 무관하며,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서사 연출 이미지입니다.

#감정없는사랑 #결혼의조건 #이혼의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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