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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eom Aug 21. 2024

추측의 늪에 빠지다.

3일 차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다. 알코올을 심하게 들이부어서 그런지 뻣뻣하고 근육이 경직된 느낌. 입안에서는 알코올 냄새가 진동할 정도로 나 자신이 역겨웠다. 무령으로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못하는 빈껍데기의 인형처럼 뇌에서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마성의 공간인 침대에 잠식되어 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솔직하게 내 심경은 아예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술을 들이키면 들이킬수록 내 정신세계는 혼동이 일어난다. 천재지변이랄까. 무수히 많은 것들이 흔들리며 내가 정해둔 토대가 금이 가기 시작하고, 작살나는 경우에 이른다. 무채색과 민무늬로 이루어진 보잘것없는 천장을 보며 고민의 세계에 잠겼다.



   

어젯밤. 신동찬이 말하길  그 누나를 알게 된 날에 술김에 연락처를 물어보고 집으로 떠난 뒤에 한 남성이 왔다. 그 남성의 정체는 누구일까. 혹시 남자친구? 아니?? 애초에 남자친구가 있었다면 나와 만나지 않았을 거야. 사실 그게 기본적인 예절이니까. 그러나 기본적인 예절을 지키지 않는 사회의 악으로 쓰레기 같은 놈들이 많다는 것이 뇌리에 스쳤다. 




그러자 진우가 내게 했던 말이 오버랩되면서 내 생각은 점점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누나와 만나지 말라고 계속 말린 게 이런 바 이유 때문에 말린 건가..? 그러나 그 근거를 확실히 하기엔 정보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아니면 이 자식들이 여자가 생기는 꼴을 보기 싫어서 짜고 치는 것일 수도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피해망상이 생긴 걸까.. 아니 애초에 내가 피해망상병에 걸린 건가? 원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이게 일반적인 거고!! 점점 나는 미쳐가는 것 같았다. 생각의 꼬리를 물고 물어서 추측의 바닷속 심해에 빠져들었고 현실과 환상이 뒤엉키는 혼란이 찾아왔다. 이성은 점차 흐릿해지고,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불쑥 튀어나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부정과 긍정이라는 두 면의 중간지점에 도달하기 위한 간극이 좁혀지지 않고, 거뭇거뭇 부정의 기운이 가득한 심연의 세계에 빠져버려 검은 욕망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도저도 아닌 거, 나 자신이 갈 길은 내가 정하는 것이라는 나만의 길 외로움이 따르는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휴대폰을 보자 시선이 흐려지게 됐다. 그녀에게 무수히 많은 전화를 시도했던 내역이 눈에 들어오면서, 내  부끄럽고 타오르는 심장이 쥐어짜이는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 작은 화면 속에는 내 마음의 모든 갈망과 후회가 가득 담겨 있었고, 그 순간의 부끄러움과 심란함은 한 층 더 깊어졌다. 




마치 시간지배자가 되어 모든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도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 후회는 하지 말자라는 마음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봤다. 그리고 다시 어제의 기억을 회상했다.   



"넌 뭐야 여기는 왜 온 거야?? 누구 기다리는 중이니? 한심한 스토킹짓 하는 거야? 이야.. 내 말이 사실이라면 넌 소름 끼치는 행동하는 거 알아?!" 동찬이에게 소리쳤다. "아니 나는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거야. 그런데 네가 현아 씨와 같이 나오는 걸 봐서 그 자리에 서있던 거야. 평소에 너답지 않게 예민하네. 그런데 뭔가 쎄한 느낌이 들지 않니? 




네게 상처 주는 말이 될 것 같아 먼저 사과할게. 미안해. 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 예쁜 미모를 가진 사람이 왜 네게 접근했을까? 우리 같이 고깃집에서 술을 적실 때, 그 누나는 시선이 항상 휴대폰으로 향했어. 만약에 네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너에 대해 궁금하거나, 알아가려고 질문을 던지는 게 맞다고 생각해. 



그런데 좀 전에 봐바. 그분 표정에 생기가 없어. 무언가 지쳐 있는데 절박하고 조급한 느낌이랄까? 배고픈 하이에나가 허기를 달래려고 아무 먹잇감에 달려드는 듯한 느낌이야.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네게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너를 바라보는 눈빛부터 다르다고 생각해. 그런데 초롱초롱한 눈빛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눈에 힘이 없고 전체적으로 맥아리가 없어 보여. " 동찬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와인바에서 눈빛이 초롱초롱하진 않았다. 피로와 무력감이 공존하는 분위기가 아니라, 어느 무언가의 고민의 세계에 잠긴 것 같았다. 빛보단 어둠에 가까웠으며, 단순히 그녀가 커리어를 향한 여정이 고되고 힘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와 같이 있던 순간 아니 한 장면들이 마치 필름처럼 낱낱이 편집되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모든 남자는 다 똑같아. 특별한 거 없더라." 그녀의 의중은 무엇일까? 그녀의 말엔 무슨 의미가 담겨있을까..? 마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매 순간 걸식을 하면서까지 평생 훈련을 받쳐 결국엔 그 지점에 도달하는 고대의 수도승들처럼. 그러나 그렇다고 보기엔 현아누나는 그 정도의 경지에 올라가려면 한참 멀었다고 생각이 들지만.



그래.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면 눈빛과 분위기부터 달라야 된다. 아니? 애초에 동찬이는 편향적인 사고를 지닌 얘라 사고의 폭이 넓진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얘는 나와 마찬가지로 연애경험이 거의 없으며, 여성에 대한 지식은 전무한 상태다. 



내가 본인보다 여자친구를 사귀는 게 부러워서 질투와 시기심에 관계를 차단하려는 건지.. 진정으로 나를 위해 조언과 주의를 주어, 안 좋은 관계가 형성되기 전에 막으려는 건지.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당장 손에 잡히는 게 있으면 던지고 부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나도 모르게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본능이 솟아오른다.   



짜고 치는 고스톱인지, 체스판 위에서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장기말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도 어쩔 도리를 몰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래. 그때 내게 연락처를 물어본 이유를 물어봤어야 했는데.. 과도한 긴장으로 물어볼 것을 물어보지 못하고, 인위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려고  쓰잘 기 없는 소리만 짓거린 내가 한심하고 미웠다. 



"야 듣고 있어? 그리고 그날에 너가 택시 타고 간 뒤에 한 남성이 현아 씨에게 다가갔단 말이야. 그리고 서로 같이 어딘가로 가던데?? 무언가 좀 이상해. 나는 만약에 네가 현아 씨와 연인관계를 발전하는 건 추천하지 않아. 느낌이 이상해." 



그래 나도 이판사판으로 누군가의 장기말이 되지 말고, 오히려 판을 짜보자라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먼저 내 궁금증을 풀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걸었더니 그녀가 받았다.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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