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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eom Aug 23. 2024

잘못된 믿음


"여보세요??" 흔들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현아 누나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게 질문했다. "무슨 일로 전화한 거야??" 동찬이 말대로 밝은 느낌이 아닌, 어두운 느낌에 근접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관심이 있거나, 좋아하는 감정이 담겨있을 때 어떤 미소와 어떤 말투로 남자에게 대하는지..



정확히 말해서 좋아하는 남성 앞에서 목소리 변화가 일어나는지.. 더 깊게 들어가 목소리는 밝은 톤에 속하는지.. 남자를 바라볼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눈빛이 별을 본 것처럼 반짝이고 초롱초롱하며, 애교가 가득한지.. 나는 그런 정보가 전무했기에, 절박할 정도로 필요했다. 여자가 먼저 관심을 품고 다가온 적이 없는 나는 번호를 물어보는 게 소설이나, 영화에서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나는 그런 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가며, 한 번쯤은 여자가 먼저 다가와주길 바랬던 것이 아닐까? 그런 믿음은 저버리면서, 오히려 그런 이벤트들이 일어나길 바랐던 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냥 누나 잘 들어가신 지 궁금해서요. 그때 좋은 시간 보낸 것 같아서.. 감사했어요.." 남성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놀이터에서 모래 쌓고 노는 아이들처럼 보였을까 봐 내심 걱정했다. 최대한 부끄러움을 감추고 말했지만, 눈치가 빠른 여자는 어떤 일이 닥쳐도 능구렁이처럼 유연하게 잘 빠져나가는 습성이 있다. 그리고 한 번 물은 먹잇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 



그러자 그녀가 말문을 뗐다. "저만 그렇게 느껴진 게 아니라서 좋고.. 다행이네요.. 그때 조금 수줍고 부끄러워서 얘기를 잘 못한 거 같은데.. 현재 씨 얘기만 들은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그 시간이 띄엄띄엄 기억나는데,

뭐 실수한 거 없었죠?? 그래도 저도 얘기를 조금이라도 했죠??" 그때의 시간을 회상했지만, 나 역시 알코올에 크게 당해 기억이 잘 나진 않았다. 



"뭐.. 제 얘기만 했나..?? 그래도 들어주셔서 감사한걸요. 다음에도 분위기 좋은 펍이나, 와인바 같이 가요.. 현아 누나 덕분에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거 같아서 다시 한번 경험하고 싶네요.."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뒤 부끄러움의 농도가 짙어졌다.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고,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불도저로 밀듯이, 직진했다. 그녀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 터질듯한 심장을 움켜쥐고 숨을 참고 있었다. 



"아.. 마침 저도 분위기 좋은 펍 알아서 같이 가자고 말하려 했었는데.. 먼저 얘기해 줘서 고마워요.." 내 신청을 받아주자 기분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런 맛으로 여자친구를 사귀는구나.. 마음속에서는 얼른 현아누나와 관계를 연인관계로 발전하고 싶었다. "네 고마워요.. 그럼 이따가 연락드릴게요." 부끄러움을 숨긴 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듯이 차분하고 정돈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신나고,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상나래를 펼치며, 혼자 설레발치는 것은 아닌지, 인터넷에 분위기 좋은 펍을 검색하며 찾고 있던 도중, 진우에게 전화가 왔다. 처음엔 받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10초가 지나도 끊지 않는다면 받을 생각이었다. 



전화는 끊기고, 다시 걸려왔다. 얘가 두 번 전화를 걸 정도면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바로 받지 않고, 일을 하다 받은 것처럼 상황을 연출했다. 그리고 약간의 연기가 첨가됐다. "어 무슨 일이야..?  잠깐 업무 보다가 전화가 온 줄 몰랐어." 



"너 지금 일하고 있어? 회사야?? 너 나 좀 보자. 너에게 할 말이 있어. 일은 언제 끝나..?" 진우의 말에서 평소와 다르게 다급함 느껴지며, 동시에 불안이 담겨있었다. 자유롭고, 자신만만하고 항상 여유로운 모습을 보인 진우를 보다가, 불안하고 다급하게 느껴지는 모습을 보며, 무언가가 이상했다. 



"왜 무슨 일인데. 평소에 너답지 않게 불안해 보여.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전화로는 말 못 하고, 만나서 얘기하자. 일 언제 끝나?" 항상 내 말을 무시하고 본인 말만 하며,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는 진우의 모습에 분노가 점차 솟구쳤다. "아니 어떻게 너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너 혼자만 이야기하냐 그런 이기적인 태도를 고치면 안 될까?." 짜증 섞인 말투로 진우에게 공격적으로 말했다. 



진우의 걱정이 휴대폰 너머로 느껴지기에,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진우가 현아 누나와 관련이 있는 것인가? 평소에 진우답지 못한 분위기와 행동이 결국 나를 점점 더 의심하게 만들었다. "얘기는 만나서 하자. 8시까지 xx세탁소 앞에서 만나. 술 한 잔 하게. 오는 걸로 알고 있을게." 또 이기적인 태도를 보인 진우에게 열불이 났지만.. 이번을 마지막으로 참아줬다. 



평소에 진우의 모습이 아닌,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을 보아 궁금증이라는 연기가 내 머리에 퍼졌다. 환기를 시키려고 해도, 그의 과도한 걱정과 초조함을 본 나는 잊히지 않았다. 지금 시각은 오후 5시. 시간이 이렇게 느리게 간 기분은 오랜만에 느껴본다. 



나는 대충 준비하고, xx세탁소 앞에 약속 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누나와 대화를 나눈 메시지를 보고 있는 도중, 진우가 나를 불렀다. 역시 이상하다. 평소에는 약속 시간을 잘 지키지 않고 약속시간을 늦은 것에 대한 미안함은 전혀 없이 뻔뻔함을 잘 드러냈다면, 지금은 숙연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만나자는 이유가 뭐야? 얼마나 중요한 얘기길래, 고집부리면서까지 날 불러내냐. 아. 평소에 고집은 셌지." 여전히 진우에게 공격적으로 말했다. " 저기 앞에 있는 XX펍에 가자. 내가 사줄게. 그래도 나와줘서 고맙다."진우가 처음으로 겸허하게 감사인사를 전하다니? 그에게 처음으로 느껴본 감정이다. 이런 면도 있었나 하고..



XX펍 조용한 분위기가 은은하게 감도는 작은 매장이었다. 안에 들어가니, 조용한 분위기가 나를 감싸며, 벽지는 오션블루의 색으로 시원함을 연출했다. 그러나 조용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진 않았다. 바로 앞에 한 건장한 남성이 있었는데 이 매장의 지배인이자, 관리자인가 보다. 검은 셔츠로 윗단에 풀린 단추, 여성들이 좋아할 것 같은 분위기다. 



그는 우리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넸고, 그 덕분에 마음은 한층 따뜻해졌다. 시원함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묘한 분위기. 구석진 자리에 앉고, 간단한 안주와 칵테일을 주문했다. 주문하고, 진우가 사는 거니깐 이왕 비싼 안주를 주문할까 고민했지만, 비싼 안주보다는 진우가 숨겨두고 있는 마음이 더욱 중요했다. 



"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무슨 일이야. 내 일하는 시간을 미룬 만큼, 사실대로 얘기해 줬으면 좋겠어.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만나서 얘기하자고 한 거야? 심각한 얘기인가?" 진우는 고민한 듯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 현아 누나에 대해서. 지금은 잘 되어가고 있어?" 진우의 말을 듣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네가 지금 내게 할 말이라는 게, 현아 누나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야?, 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줬으면 좋겠어." 진우에게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먼저 사과를 할게. 미안해. 나 현아 누나 좋아했어.. 그리고 내 파트너였어." 그 말을 들은 나는 순간 멍해지며, 시야가 흐려 질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리고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하며, 설렘의 감정이 아닌, 분노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심장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내게 현아 누나는 순수성을 지닌 동시에, 매 순간 고난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마치 흔들림 없이 자리 잡은 큰 바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짓거리를 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래 양심은 있네. 내가 그 누나와 관계가 진전되는 거 같아서 미리 알려준 거야? 아니? 어떻게 보면 괘씸하네. 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울분을 토하고 싶었지만, 최대한 인내하려고 노력하며, '참자'라는 말을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다. 



"그 누나 이상해. 처음에는 그런 관계로 만났다가, 나도 너처럼 그 누나의 성격에 매료됐어. 강인하면서 때론 시원한 성격, 그리고 내적으로 단단한 모습에 마음이 갔어. 그래서 내 마음을 전했지. 그런데 안 받아주더라고. 그런데. 내가 같이 있을 때 그 누나의 폰을 엿본적이 있었어. 자는 사이에, 휴대폰 잠금해제하고 봤는데.. 남자가 많았어. 그리고 유독 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더라. 처음엔 나도 잘못 본 줄 알았어. 평소 그 누나의 모습,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으니깐. 어느 날은 내 지갑에 손을 대고 있길래, 뭐 하는 짓이냐고 화를 낸 적이 있었어. 아무 말하지 않더니, 내 사진이 있나 없나 궁금해서 들쳐봤다고 하더라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런데 내가 그 누나를 유심히 관찰해 본 결과.. 너처럼 돈 걱정이 없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더라. 연락을 주고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사업가나,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었어. 그러니까 네가 본모습과는 다르게 돈 X나 밝힌다고. 조심하라고. X나 충격적인 거 알려줄까? 그 누나 마지못해 동찬이한테도 연락했어. 정말 골 때리지 않아? 



난 너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해. 그 누나한테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 지금 여우한테 놀아나고 있는 거야."

진우의 말을 듣고, 내 머릿속에 혼란이 생겼다. 그리고 내 마음에 대미지가 누적돼서 그런지 고통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내가 본 현아누나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니 믿고 싶지 않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진우의 얘기가 끝난 참에 지배인이 와서 레몬이 첨가된 칵테일과 얇게 썰린 모둠 과일을 작은 탁자에 내려놓았다. "손님 오늘 마음이 편치 않아 보이네요. 괴로운 감정은 털어내고 좋은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긍정의 기운이 가득한 한마디에 잠시 위로가 되었지만, 금세 사라졌다. 사실이 아니고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자 현아 누나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이따가 잠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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