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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eom Aug 30. 2024

어둠의 심연 속으로

어린 시절에 지겹도록 들었던 어머니의 말씀이 있다. 사람을 믿지 말라고. 너에게 아무런 이유 없이 다가오는 사람은 환영을, 어떤 조건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은 공격태세로 전환하고 최대한 피하라고. 그때는 어린 마음에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말이라고 여긴 나는 이제야 어머니의 말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된다. 이 잔혹한 세계에서 서로의 자원을 쟁탈하려는 싸움이라, 언제 내 자원이 갈취당할지 모른다. 방심하고 있으면 당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로 다가오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자원을 지킨 자는, 승리를, 자원을 뺏긴 자는 패배를. 이 잔혹한 세계에서 도태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로 서로의 자원을 뺏고 뺏기는 사회이다. 




승리한 자는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패배한 자는 주변에 사람들이 떠나간다.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여긴다. 그 사람에게 자신의 자원을 투자하며 영웅처럼 섬겼지만, 단 한 번 마음의 유리에 금이 가기 시작하게 되면 그 인물에 대한 신의가 깨지게 된다. 그로 인해 예리하고 날카로운 비수가 되고 다른 이와 함께 작전을 펼쳐 결국 그 인물의 심장 깊숙이 칼을 꽂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동찬이는 진실이 담긴 말로 나와 함께 전쟁에서 승리할 아군인가, 거짓된 말로 포장하여 자원을 갈취하고 패배를 자초하게 할 적군인가. 고민의 꼬리를 물고 물었다. 경거망동한 동찬이에게 신중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무슨 의미로 말한 거야?" 신중함과 끓어오르는 분노가 공존하는 마음의 세계에서 두 지점의 간극을 좁히며, 그 사이의 균형에 가까워지려고 머릿속에 되뇌었다. 




무턱대고 화를 내는 것보다,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이 상황을 풀어나가는데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합리적인 의심을 품고, 이성적인 추론을 해보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훨씬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신중한 모습에 놀랐는지 동찬이도 그에 맞춰 신중한 태도로 응답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해줄게. 대신 진중하게 말할 거야." 동찬이의 표정에는 진지함이 묻어났다.

"그래 알겠어. 대신 솔직하게 말해줘. 난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니깐." 이 말을 들은 동찬이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진우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놈이라고 생각했어. 뭐만 하면 여자들이 먼저 다가와주니깐, 그리고 문란하게 지내잖아. 어떻게 보면 더럽지만 부러운 것도 있다? 결국에는 남자가 원하는 것은 나만 바라봐주는 여자이니깐. 그런데 진우는 그런 여자를 소중하게 대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성적 욕구를 풀기 위해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직접 밀회하는 장면도 목격했고.  침대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 보내느라 정신없겠지. 그래서 난 진우는 친구로서 좋은 친구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래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난 진우가 궁금한 게 아니라, 네가 무슨 생각으로 현아누나한테 연락처를 얻은 경위가 무엇이고, 왜 나에게 이런 말을 꺼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한 거야. 너의 의도도 궁금하고." 동찬이는 잎 안에 고여있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네가 기분이 언짢을 수 있지만, 너는 나와 같은 동급의 레벨이라고 생각했어. 외적으로 뛰어나지 않고 히키코모리처럼 집 안에서 틀어박혀 지내던 네가 세상밖으로 나와 여자를 만난다는 게, 나로선 믿기지가 않았어. 거기에서 약간의 질투심이 올라왔어. 아니, 약간이 아니야. 질투가 났어. 너와 나는 동급이라 생각했는데 그날에 갑자기 예상을 뛰어넘는 행동을 하더니 여자를 만나더라? 점점 격차가 벌어질 것 같아서 걱정이 됐어. 





네가 현아누나한테 연락처를 물어봤을 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준 게 은근히 부러웠지만 이해가 되질 않았어. 네가 간 뒤로 나도 그 누나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어봤는데, 그냥도 아니고 웃으면서 주더라. 처음엔 연락처를 받아서 떨리고 부끄럽고.. 좋았는데 갑자기 느낌이 싸하더라. 나 지금까지 계속 연락했어. 충격적인 거 알려줄까? 내일 만나서 술 마시재. 이 누나 제정신이 아니야. 지금까지 네게 현아누나와 연락한 사실을 숨겨서 미안한데, 이건 아니야 현재야. 나는 위험하다고 생각해."





동찬이의 말에는 진지함이 묻어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어쩌면 진우얘기가 맞는 줄 모른다. 그 녀석 또한 현아누나와 가깝게 지내는 것을 반대했으니깐. 처음에는 그 잘난 녀석이 현아 누나를 못 가진 거에 대한 결핍감으로 나와 현아 누나의 관계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작전인 것 같았다. 본인보다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하는 얘가 본인도 이루지도 못한 것을 이루려고 하고 있으니깐.




진우가 나와 현아 누나의 관계를 방해하려는 이유가 그 결핍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우는 누구보다 소유 욕구가 뛰어난 놈이니깐. 하지만 아직 동찬이의 말이 사실로 판단하기에는, 나만의 직감이라 명백한 근거가 필요했다. 동찬이의 눈빛을 보자 무언가를 결심한 듯 누구를 속일듯한 눈빛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마치 승리를 위해 온갖 더러운 짓을 감내하며 자신의 야욕에 사로잡힌 인물이 아닌, 서로의 유대감 형성으로 무리를 짓고 악을 처단하려는 군사처럼 느껴졌다.




"잠시 기다려봐. 현아 누나 밑에 기다리고 있어서 마무리 짓고 올게.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말하자고." 얘기를 건넨 후 계단을 한 발자국씩 내려가며, 계속해서 떠오르는 동찬이의 말에 큰 충격과 누나의 배신감에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동찬이의 본심을 듣게 되어 기분이 오묘했다. 첫째로 나를 본인과 동급으로 본다는 사실에 기분이 언짢았고, 진실이 담긴 말로 내가 곤경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줬다는 의리감 두 감정이 교차하여 마치 바람처럼 내 주변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서니, 누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 화면을 중시하고 있었다. 그러고 자리에 앉자 아무런 말 없이 차갑고 서린 기운이 맴돌았다. 동찬이에게 진실을 듣고 온 나는 누나가 괘씸해 보였다. 인상이 이렇게 좋아 보이는데, 뒤에서 그런 수준 낮은 행동을 하고 있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내게 먼저 다가와준 여성은 현아 누나가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고, 더더욱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비극의 길을 걷게 되니, 한편으론 쓸쓸하고 마음의 옹달샘이 넘쳐흐르듯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여성 앞에서 남자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관계론의 법칙이 떠올라 애써 참았다. 그리고 현아 누나의 의사를 묻지 않고, 직원을 불러 소주를 시켰다. 현아 누나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나를 속이고 있다는 행위 자체가 나를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무엇이든 던지고, 깽판을 치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지만, 현실에서 그러한 행동을 하면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이처럼 보이기 십상이기에, 현실과 이상의 세계를 구분을 잘한 나였다. 



계속 현아 누나의 울림이 내 귓가에 스쳤다. 그러나 충격 때문인지,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고 동찬이의 말이 계속 떠올랐다. 휴대폰의 무음모드랄까. 나를 계속 건드린다. "야 술을 왜 시켜. 그리고 별거 아닌 전화라면서 뭐 이렇게 오래 걸려?" 심술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와 연인관계인 것 마냥 묻고 따지기까지 한다. '그래 알았다. 이게 니 x 본성이구나." 마음이 아주 통쾌했다.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 왔던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누나. 나 할 말이 있어. 내 얘기를 들어주면 안 될까..?" 모든 걸 꿰뚫고 있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전과는 다른 분위기에 놀란 누나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 의사는 무시한 채 계속해서 자신의 감정을 헤아려주라는 말을 거듭했다. 나는 그런 배려심이 없는 누나의 말을 끊고 내 말을 확실하게 전했다. "아. 누나 말 끊어서 미안한데 내가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어." 내 말에 담긴 단호함이 드러나자, 누나는 순간 멈칫했다. 



술기운에 점점 취해가는 나는 그동안 누나와 연락하며, 각 종 사건들과 힘들었던 감정들이 서서히 올라왔다. 평소에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들을 누나의 눈치를 살피느라 물어보지 못했지만 이 기회로 모든 것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누나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무언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야. 그저 사실대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너? 갑자기 밖에 나갔다 왔더니 이상해졌어." 밖으로 나가기 전과 후로 갑작스럽게 변한 분위기에 누나는 놀랄 수밖에 없다. 전에는 한 없이 약한 모습을 보인 내가 지금은 야무진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흔들리지 않는 아이컨택으로 분위기의 주도권을 잡았다. 정확히 말하면 눈은 보지 않고, 미간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 상대방이 느끼기에 아이컨택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마법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런 정보는 평소에 자신감이 없던 내가 아이컨택을 잘하고 싶은 절실한 마음에 인터넷을 뒤지다시피 했다.  의식적인 노력이 들어간 만큼 값진 보상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래서 누나 말해줄 수 있을까?"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느낌으로 누나에게 말했다. 




"아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어. 뭐를 솔직하게 말해!!" 누나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누나 동찬이랑 연락한다며. 그리고 동찬이 말고도 다른 남자 만난다고 하던데?"




누나는 갸우뚱하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네가 내 보호자도 아니고, 우리 연인사이도 아닌데, 그 지점을 신경 쓰는 건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는데? 너무 오지랖이 넓은 거 아니야?" 



'드디어 이 누나의 본성이 나왔구나.' 평소에는 커리어우먼을 향한 힘든 여정을 걸으며 마치 거대한 바위 같은 모습을 떠 올릴 정도로 흔들리지 않는 마인드. 그리고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열정의 불꽃으로 하루를 의미 있고 가치롭게 보내는 '갓생러'처럼 보였다면 지금은 남자문제로 산전수전 다 겪어 자신이 불리한 지점에서 유연하게 벗어나는데 도움 되는 '혜안'이 열린 느낌이었다.    



얼마나 경험이 많았으면 미꾸라지처럼 유연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여자경험이 전무한 내게조차 

누나는 남자들과의 경험이 많다고 느껴졌다. "동찬이? 걔가 나한테 먼저 다가왔어. 연락처를 물어보길래 불쌍해서 준 거야. 그리고 연락을 얼마나 많이 했다고.." 그래 동찬이는 내게 사실대로 말을 했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말을 듣고 현아 누나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역겨웠다. 



본인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가치가 현저히 낮게 평가해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 비윤리적인 사고방식이 순간 나를 멍해지게 만들었다. 이런 사람과 연락하며 관계를 맺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누나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라는 궁금증이 들었다.




동찬이와 마찬가지로 나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야생에서 활동하는 짐승이라고 생각했을까. 이 자리에서 이 누나와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들을 가치도 없다 판단해 그 자리에서 벅차게 일어났다. 누나가 언성을 높이면서 뭐라고 말했지만, 듣지 않은 채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삐리리..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본전도 못 뽑았어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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