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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eom Aug 19. 2024

그날에 있었던 일

2일 차

진우가 말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 누나 안 만나는 게 좋을텐데." 무슨 의미로 내게 말을 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마치 거울에 비친 얼굴이 다른 양면성을 띠는 사람인지, 아니면 동찬이가 스토킹을 하는 건지, 아니면 우연히 마주친 건지.. 말 그대로 추측의 늪에 빠져버렸다. 



그 누나와 연락한 지는 이틀째가 되는 날이니.. 무엇보다 분위기 좋은 와인바에서 즐겁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한 순간에 내 기분은 유리가 한 번에 와장창 깨지듯이 멘탈이 나가버렸다. 유리에 금이 간 것도 아니다. 금일 갈 정도면 괜찮지만, 한 번 깨진 유리는 원래대로 복구할 수 없다. 



소위 내가 유리멘탈('멘탈이 약하다'라는 의미가 담긴 용어)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동물의 왕 사자가 경계심을 일으키거나, 분노할 때 털 끝이 뾰족하게 솟아오르는 것처럼 동물적인 본능이 내게 일어났다. 짜증 섞인 표정으로 변한 나는 동찬이를 몰아세우려는 내게 누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렸다. 



"현재 씨 답지 않게 왜 그래요." 그 순간 나는 느꼈다. 내가 이 누나에게 부끄러운 면을 보였구나.. 남자로서의 면모를 보이려고 했던 행동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을 바로 알아챘다. 알코올이 너무 심하게 들어가서 그런지.. 아니면 분위기에 취해서 그런지 내 감정, 곧게 뻗어 있는 신경계들이 한 곳 한 곳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무엇이든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랄까..?



바로 심호흡을 하고, 내 감정을 바로 잡았다. 아니 그냥 참은 것처럼 연기한 거다. 잔뜩 긴장해 있는 동찬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그래도 무언가 이상한 구석이 있는 것 같지만.. 아무렴 어때.. 현아 누나와 의미 있는 데이트를 한 만큼 내게는 행복하고 즐거운 기분 이상인.. 내 역사에 큰 이벤트인 날이니.. 좋은 날로 기록하고 싶었다. 



그녀는 흥이 깨진 듯.. 아까 전까지는 같이 있고 싶다더니, 오늘은 집에 들어가 봐야겠다고 그러더라. 여자는 원래 남자다운 성격을 좋아한다고 하더니, 정보는 믿을 게 안 되는구나.. 내 머릿속에 나를 괴롭히는 혼란이 찾아왔다. 내 자신을 속이는 행위를 해서 그런가.. 그래서 그녀가 눈치를 챈 건가.. 아. 또 추측의 늪에 빠져버렸구나.



"현재 씨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분위기 좋은 와인바에 데려와줘서 고마워요." 놀이터에 어린 소녀가 기뻐하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느낌이 아닌, 무언가 쓸쓸하고 길거리에 홀로 돌아다니는 아이처럼 고독한 느낌이 묻어있었다. 기쁘지 않은데 그래도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주는 말이 내 책장 속 마음에 한 켠 따뜻해졌다. 그리고 내 마음의 앨범에 그녀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 사진의 일부를 기록했다. 



여기서 더 같이 있자고 얘기하고 싶지만, 그럴 만한 분위기가 아니란 걸 느꼈기에, 나도 그녀와 같이 좋은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저도 오늘 분위기 좋은 와인바에 가서 현아 누나와 즐거운 시간 보낸 것 같아서 정말 좋았네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도 그녀의 분위기에 맞춰 같은 느낌으로 얘기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는데 진우에게 메시지가 왔다. "야 너 지금 어디야?" 평소에는 회사에서만 얘기하고 연락한 통 없던 얘가 갑자기 내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보니 진우는 현아 누나에게 관심 있는 것으로 답을 내렸다. "아 ~ 나 누나랑 같이 있어." 그러자 진우가 말했다. "야! 내가 그 누나랑 같이 있지 말라고 했지." 그러자 나는 서운한 감정과 울분이 치솟았다. 



"네가 뭔데 참견이야. 너 존X 이상해. 평소에는 회사에서만 얘기하고 연락한 통 없던 네가 갑자기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현아 누나 만난다고 하니 조급해지는 게 이상할 정도네. 너 뭐야?" 현재가 말했다. 

"아니! 난 너를 정말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날 의심해도 돼. 그런데 그 누나 좀 이상한 소문이 돈단 말이야."



오늘 현아누나와 얘기를 나눈 난 진우의 말해 공감이 가지 않았다. 내가 본 현아 누나는 어른스러움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외롭지만, 홀로 세상에 맞서는 소녀처럼 강한 자신감으로 대화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경험의 지혜가 서려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의와 책임감을 중시하며, 말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생각과 신중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커리어 우먼을 꿈꾸는 사람이다. 누구보다 확고한 꿈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계획을 짜고, 운동을 틈틈이 하며,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매 순간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 



연락한 지는 이틀정도 됐지만, 자신의 길을 걸어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다. 어른스럽고 단단한, 커리어 우먼이라는 꿈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는 그런 여성이었다. 그런 누나를 부정적인 언행으로 모욕하며,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진우가 도저히 용서가 안되었다.  



나는 진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관계가 어그러지는 것이 아닌, 깨질 정도로..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러자 진우는 내게 진정하라는 말을 취하며, 만나면 자세히 얘기해 준다고 했지만. 나는 그 문제를 바로 삭제했다. 이미 나는 진우가 현아 누나에게 마음이 있다고 단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 상황들이 일어날 수가 없다.  



마치 운명처럼,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모든 일은 알맞게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연이란 이름 아래에서 이루어진 선택은 정교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이 내 신조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관계를 편견 없이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진 않는 것을 오늘 느꼈다.



그런데 그 순간 동찬이에게 전화가 왔다. 언짢은 기분이 가득한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분노와 불편함이 핸드폰 너머로까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울리는 벨소리 마저 날카롭게 느껴졌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왜 전화했어? 나 오늘 기분 그렇게 좋진 않으니 용건만 말해." 그러자 동찬이가 말했다. "너 오늘 현아누나랑 식사자리 가진 거야..?" 아 두 놈 쌍으로 이런 질문을 하니 마음속에 잠시 잠잠했던 불꽃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해 솟아오르기 직전이었다. 언짢던 기분이 한 층 더 짙어졌다. 



"응 진우도 그러더니, 너네 둘이 뭐 짰냐? 내 일상이 궁금하지도 않은 놈들이 이제 와서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여자 생기면 안 되는 죄라도 있어?" 몹시 서럽고 짜증 났다. 따뜻하고, 뜨거운 성질을 가진 불꽃과 차갑고 시원한 성질을 가진 물처럼 서로 다른 두 속성은 공존이 불가능하듯이 내 안의 서러운 감정은 사그라지고, 분노의 불꽃이 점점 타올랐다.



그러자 동찬이가 말했다. "사실 나 할 말이 있어. 우리 다 같이 술 마시고 너랑 현아누나가 서로 얘기 나누는 거 봤어. 너 택시 타고 간 뒤에 어떤 남자가 현아누나한테 오는 걸 봤어." 그 말을 들은 나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심장의 격렬한 고동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급하게 내리막길을 내려가는데 브레이크가 고장 나 속도 조절을 못하는 기분이었다. 어지럽고 놀란 마음이, 진정될 틈이 없었다. 내 역사에 의미 있는 날로 기록되고 싶었는데, 오히려 최악의 날로 기록될 거 같았다. 



아니, 진정하자. 일단은 얘기를 들어보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술기운에 취한 나는 내 감정을 통제할 능력이 부족했다. 동찬이가 뭐라고 말하지만, 큰 충격에 몸 전체가 경직되며 말초신경이 끊어진 것처럼 그의 말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현아누나에게 의심과 궁금증이 솟구쳐 술기운을 빌려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녀는 받지 않았다. 온몸에 불안함이 뒤덮였다. 혹시나 그녀가 나를 가지고 노는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얘네들이 내가 여자 생기는 꼴을 보기 싫어 없는 얘기를 지어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계속해서 추리의 늪에 벗어나지 못하고 깊숙히 빠져버렸다.      



그러자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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