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율아리 Apr 20. 2023

장애인의 날

경계인으로서

  장애인의 날이다. 이런 날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 엄연히 법정기념일이다. 일반인들에게서의 빨간 날인 근로자의 날만큼이나 뜻깊은 날이다. 사회 일반에서 소외된 장애인들의 재활을 돕기 위한 기관 차원의 지정일에서 81년 유엔에서 세계 장애인의 해로 선포하고 우리나라에서 국가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91년 법정 기념일제정됐다고 한다.

  

  사실 나는 장애인이 아니다. 그러나 장애인의 날에 공감을 느낀다. 나 역시 일반에서 소외되어 살아왔기 때문이다.


  장애를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충분히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느니 신체나 정신기관이 결함이 있는 것으로 풀이돼 있다. 즉 정상 상태에서 결함이나 결핍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정상이라느니 일반이라느니 하는 온전함이나 완전함에 대한 정의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그것에 벗어난 상태인 장애에 대한 의미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사물이나 비인격적 객체에 대한 오류 상태의 의미로 사용해야 적확한 어휘가 아닐까 한다. 인간이나 생물, 인격체에 대해서는 무분별하게 사용해서도 안 되고 그리 적확하지도 않은 단어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관해서는 살아있는 일부인 우리가 함부로 정의할 수 없으므로.


  어제, 복지관을 그만둔 전 복지사 분을 복지관에 다니며 친해진 언니와 함께 만났었다.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안단테 카페에 대한 근황과 향후 운영에 대해 전 담당 복지사 분과 열띤 대화를 나누다 나의 남자친구, 연애 문제를 거쳐 돌고 돌아 경계선 지능 이야기에 이르렀다. 결국 우리 이야기의 본질은 경계선 지능에 있다. 모든 사회적, 개인적 문제의 근본 원인도 경계선 지능에 기인한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고 존재성이기 때문이다.

  얘기를 나누다 복지관에서 친해진 언니가 갑작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늘 내게, 또는 남들에게 자신의 어려움과 상처를 잘 토로했지만 언제나 웃는 상에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았던 언니이기에 언니가 우니 복지사 분도 나도 어쩔 줄 몰랐다. 언니는 울면서 하느님이 저를 세상에 왜 태어나게 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경계선 지능을 바라보는 세상의 모질고 비열한 시선과 그런 세상에 이용만 당하고 적응하지 못해 상처받은 상황이 언니를 울게 했던 것이다. 언니의 눈물의 상황은, 내게는 너무도 보편적이라 전적으로 공감됐고 이해됐다. 나도 울컥할 지경이었다. 그것은 같은 정체성의 이야기이자 존재의 상처이기 때문이었다. 언니가 겪은 모든 일은 내가 비슷하게 겪은 내 모든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와 언니가 겪은 성장과정과 삶은 우리와 같은 경계선 지능인들의 모든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경계선 지능인들의 모든 일은 사회가 정의한 정상과 일반에서 유리된 공동체들-장애인, 소외 계층, 취약 계층 등-의 비슷한 아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의 모든 상처와 아픔은 일반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정상 범주라고 정의된 다수의 공동체 역시 사고나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따위로 장애나 소외를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경계선 지능의 이야기는 우리만의 특수한 이야기가 아닌 보편적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장애인, 장애인의 날도 그렇다. 우리 모두가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장애인의 나날을 보낼 수 있으며 장애인의 날을 제정한 사람들과 사회의 지원과 시선이 절실해질 수 있다.


  사실 경계선 지능은 장애도 아니고 비장애도 아니다. 그렇기에 장애인도 아닌 경계선 지능인인 내가 장애인과 장애에 대해 얘기하는 게 어불성설이고 적절치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경계에 있는 것들이 사실 제일 불완전하다.


  일반이든 장애든 그들은 명확한 범위를 가지고 있고 소속돼 있다. 일반인은 일반이라는 명징한 정의로 보호받고 있으며 장애인 역시 분명하게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지원과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러나 경계에 있는, 경계선 지능인들은 아니다. 그 규정조차 명확하지 않으며 불분명한 정의만큼이나 관심에서도 벗어나 있고 그러므로 당연히 지원도 없다. 경계선 지능인들은 일반인은 아니기에 일반인들만큼 사회에 적응하고 생활을 적절하게 영위해 나가기 힘들다. 장애만큼 심각한 기능적 한계에는 도달해 있지 않지만 그에 준한다. 심지어는 장애에 매우 가까운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장애라기에는 불분명하단 이유로 사각지대에 있는 것이다.


  혹자는 경계선 지능이 무슨 장애냐고 한다. 장애인들 밥그릇 뺏는 것이라고 한다. 장애의 범위를 높여 사회 재정 낭비를 초래한다고 우려를 넘어 비약하는 시각도 있다. 인정한다. 사회 국가적 재정은 한정돼 있고 지원 역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경계선 지능까지 지원을 넓히게 되면 진짜 장애인들에게 돌아가야 할 지원이 축소될 여지가 있고 이것이 장애인들 밥그릇 뺏는 것, 국고 낭비라는 말을 나오게 한다. 심지어 장애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넓히는 몸집 불리 기라는 얘기도 있다. 많은 말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현대 사회는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이다. 명쾌하게 정의되는 일반과 장애의 기준만 기준이고 그 사이의 경계들을 외면한다면 그 경계들은 또 다른 소외계층이 된다. 경계선 지능뿐 아니라 경제적 차상위 계층들도 똑같은 경계로서 지원 사각을 호소하고 있으나 외면받고 있다. 경계를 제외한 이분법적 복지만이 작금의 사회에 생겨나는 이유는 이런 시각이 도처에 깔려있고 우리들의 무관심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복지는 결코 적지  않은 경계 계층들을 소외시켜 이들의 사회 진출을 부정하거나 방치해 또 다른 사회적 손실을 낳게 한다.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계층들을 외면하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이, 우리들의 소중한 재산을 지키고 우리들의 밥그릇을 사수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재산은 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다. 사회 모든 것들과 상호작용하고 때로는 지원받아서 얻은 것이다. 부정하지 말자. 아무리 일반이어도 그들 역시 최소 한번 이상은 지원을 받는다. 또한 장애인들의 밥그릇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누구로부터의 밥그릇인가. 소외 계층이 다른 소외계층을 소외시키는 것 밖에 안된다. 장애인들에게의 지원과 보조를 밥그릇이라고 일반인이 표현하는 것은, 한 계층을 특정화 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묻자. 복지와 지원의 의미를. 복지와 지원은 뺏고 빼앗기는 특권 같은 것인가? 만약 경계인들을 소외시키고 지켜낸 밥그릇이라면, 이웃을 제외하고 나만 받을 수 있는 밥이라면 진정 모두가 행복한 일일까.


  복지 사각으로 밀려 비경제적 활동인구가 돼버린 경계층들은 당연히 사회적 빈곤계층이 될 것이고 빈곤계층 풀만 늘어나 더 큰 지원 낭비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특권화해 반목하고 싸우는 것이 아닌 진정한 화합을 해야 한다. 모두가 행복하고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내가, 내 소중한 사람들이, 행복해질  있다.


  장애인의 날, 비장애인이자 경계인으로서 생각해 봤다. 그러나 내 글이, 내 목소리에는 모순이나 오점이 있음을 나는 인정한다. 나는 경계선 지능인을 대변하기에는 너무나 혼란스럽고 역설적인 존재다. 경계선인이 아니라 누구보다 일반인이 되고 싶은 사람이 나이기에 편견이 내 안에도 있기 때문이다.

   설사 경계선 지능인들도 장애로 분류돼 장애등급을 받을 수 있고 그 기준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해도, 나는 장애등급을 받거나 장애로서 낙인 되어 지원받고 싶지 않다. 사실 이 문제는 장애등급, 사회적 낙인 같은 딥한 문제로 또 들어가게 되니 여기까지 언급하겠다. 경계선 지능인들도 사회적, 법적, 대중적으로 일정 부분 장애로 규정되어 지원을 받는 상황이 필요하다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것을 원치 않고 일반인으로 살아가고 싶은 모순. 일반인으로 살아가고 싶으면서도 사회 부적응을 계속 겪어야 하는 현실을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는 모순. 이 모든 모순이 내 주장을 의미 없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경계선 지능인으로서 목소리를 낼 자격이 없다.


  모든 상황은 빛과 그림자가 있다고 장애로서 지정돼 지원받는 상황은 다른 중요한 일반적 삶으로서 의미들을 잃게 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지 간의 어떤 편견도 없어야 하고 인간의 가치를 초월적으로 성숙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돼야 하는데 이렇게까지 이상적인 사회는 어느 시대가 와도 이루어질 수 없는 유토피아라고 생각한다.

  나와 같이 경계선 지능인이면서도 경계선 지능인들은 혼란에 놓여있다. 경계선 지능을 부정하고 싶고 일반인으로서의 삶을 더 꿈꾸는 이들과 같은 경계선 지능이지만 경계선 지능을 인정하고 일반적 삶이나 사회적 체면과 자의식을 희생해서라도 오로지 지원만이 절실한 이들이 있다. 경계선 지능인들의 인식 자체도 모순에 놓여있는 실정이라 사실 문제는 더 어렵다. 우리끼리도 이렇게 다르니 사회적 인식에 차마 책임을 돌릴 수 없다. 인정한다.

 

  장애인의 날. 나는 이 날의 의미가 확장돼 복지가 필요하지만 사각지대에 놓인 경계선 계층까지 아울러야 한다고 본다.

이는 진정한 복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단순히 우리보다 못났거나 부족하다는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수동적으로 지원이 필요한 계층으로 인식하는 것은 넘어서야 한다. 물질적 복지만이 장애인, 경계선 지능인, 차상위 계층 등의 이들에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물질적 복지는 기본이지만 정신적 복지는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들의 자존감과 미래 인식에 상처를 주고 이들의 존재를 낮춰서 이루어지는 복지가 아니라 이들에게 자신도 충분히 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긍정적 인식을 심어주는 게 더 고차원적 복지다. 이들이 일반 사회에서 소외됐다는 인식을 심어주면 안 된다. 모든 인간들은 사랑받고 싶어 하고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기에. 모든 사람들은 중요하다는 기본 인식을 지키는 복지가 필요하다. 진정한 복지는 계층, 편견을 넘어 순수한 행복을 주는 것이다.

  

  장애인의 날 얘기를 하다 경계선 지능인의 현실과 진정한 복지 등 거창하게 와 버린 것 같다. 심지어 나 자신의 모순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글까지 됐다. 과하게 글이 부풀었지만 마무리는 이렇게 하고 싶다. 장애인의 날. 어떤 핸디캡이 있든 모든 인간들은 사랑받아야 한다고. 어떤 인간도 아니고 바로 모든 인간들이. 진정한 복지든 경계인들의 현실이든 자기모순이든 바로 이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이다.


 장애인의 날을 경계인으로서 응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형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