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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아리 Apr 29. 2023

경계선 지능이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 같다고?

악의적인, 너무나 악의적인

 경계선 지능이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 같다고?


  굳이 일부러 검색해보지 않았다. 인터넷에 쓰인 경계선 지능을 바라보는 시각과 글이 어떤지 알기에,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은 피하려고 하는 게 내 오랜 방어기제이자 습성이니까. 그래서 인터넷에서 유명한 경계선 지능 커뮤니티는 딱 한 곳 만을 제외하고는 보는 걸 끊거나 보지 않았다. 그 한 곳도 사담이나 친목 위주의 곳이 아닌 형식적이거나 객관적인 게시글이 많이 올라오는 곳이라 그나마 가입해서 보고 있는 곳일 뿐이었다. 아마 이 세상에서 경계선 지능을 가장 외면하는 부류는 같은 경계선 지능일 것이다. 경계선 지능들은 경계선 지능을 검색하거나 찾지 않는다. 인터넷으로 여론을 볼 필요조차 없이, 이 세상 자체가 여론이기 때문이다.


  경계선 지능 13퍼센트 시대다. 10명 중 2명 정도는 경계선 지능이라는 얘기다. 우리 주변에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조금 우리보다 모자란 유형의 사람들. 다형제 집안의 k장녀로 유명한 연예인의 동생도 경계선 지능이라고 보도되었다. 장애등급을 받기 힘든 게 경계선 지능이지만 그 연예인의 동생은 장애등급을 다행히 받았다고 한다. 유명 연예인이자 누나로서 그녀의 노력과 입김도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 쉽게 발견되는,  특히 요새 유아나 아동에게 주의력 결핍만큼이나 빈번하게 발견되는 경계선 지능은 그러나 아직 일반에게는 마이너한 개념이다. ADHD나 자폐 스펙트럼에 비해 대중에 잘 안 알려져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만큼 정화 작용이 적어 음지에서의 편견도 많은 편이다.


  나는 경계선 지능을 찾아보지 않는다. 내가 팟캐스트 시절 때부터 구독해 즐겨봤던 정신과 의사들의 유튜브 영상 중에도 경계선 지능이 다뤄졌지만 클릭해 보지 않았고 유명 시사 프로그램이나 메이저 뉴스에서 비중 있게 보도 돼도 보지 않았다. 철저하게 언론이나 인터넷 영상, 게시글을 회피했다. 하지만 그러다 참을 수 없는 호기심으로-연예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보는 것처럼-찾아본 몇 개의 영상과 게시글에서, 나는 상상 이상으로 수준 이하의 댓글을 발견했다. 그 댓글들을 보고 나는 분노를 넘어 정서적 타격까지 입었다.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면 그런 글을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쓸 수 있을까. 그 인격이나 인성마저 의심스러울 정도로 도가 심한 글들이었다. 댓글을 본 경계선 지능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기에 악의적인, 너무나 악의적인 저격이었다.


  경계선 지능들을 국가적 차원에서 불임시켜야 한다.

유튜브 시사뉴스 댓글이었을 것이다. 어떤 닉네임의 익명이 지속적으로 그런 취지의 댓글을 달았다. 영상은 경계선 지능에 대한 시사 보도 내용이었다. 그 댓글을 쓴 자의 의견은 이랬다. 경계선 지능들에 대한 복지는 필요하지만 유전자가 저능함으로 그들이 불임수술을 받는 조건으로 국가가 지원해줘야 한다고. 그 저열하기 그지없는 의견을 그 자는 진심으로 주장하고 싶었는지 한 영상에 댓글을 여러 개 달았다.

  그 자가 주장하는 후손을 끊어야 하는 저능한 유전자의 당사자로서 나는 정서적 상처를 심하게 받았다. 그 댓글에 대댓글을 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키보드 워리어가 될 능력도 용기도 없었다. 모종의 광기에 사로잡힌 그 자에 맞설 자신이 없었다. 그 자의 불임 의견은 내 기억상 공감도 많이 얻었다. 경계선 지능이고 여자인 나는 그 댓글에 진짜 불임수술을 받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일반의 의견이 있다는 자체가 내겐 폭력이고 충격이었다. 한 인간이 한 인간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글. 그 글을 발견한 지 시간이 꽤 흘렀다. 그자와 같은 생각을 한 자들의 공감도 시간이 많이 지났다. 아직도 그자와 그 자의 의견에 동조한 자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경계선 지능의 유전자는 무슨 범죄자나 병균의 유전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나는 그 글이 너무 어이가 없어 캡처까지 해서 내가 친하게 지내는 경계선 지능 지인들에게도 보냈다.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충격과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내가 더 심하게 분노를 느낀 건, 그 자의 의견에 논리적 반박을 할 수 없는 내 자신에게 있었다. 경계선 지능인들에게 불임하라는, 아니 국가가 강제로 짐승들 거세 수술 시키듯 불임시켜야 한다는 노골적이고 자극적 주장에 생물학적 반대 의견을 달 수 없다는 게 처참했다. 굳이 20세기의 적폐인 우생학을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유전자의 중요성을. 열등한 인간. 열등한 유전자. 그게 나나 나와 같은 경계선 지능들을 향한 뿌리 깊은 증오이자 본질을 건드리는 말임을 알기에 나는 그 댓글에 치욕을 느꼈고 그 글에 치욕을 느끼는 내가 치욕스러워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나는 또다시 내 폐부에서부터 치욕이 올라왔다. 내 호기심이 내 무덤을 또 팠다. 그런 글은 아예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하는데, 왜 경계선 지능 글에는 꼭 그런 의견이 지뢰처럼 있는 것인가.


  이번에는 블로그 게시글이었다. 성인 경계선 지능을 치료하는 것에 대한 포스팅이었다. 거기에 포스팅의 의도와는 전혀 동떨어진 댓글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경계선 지능들은 생활고에 시달려 극단적인 선택을 할 것 같다는 글이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강아지 사진과는 대조적인 어떻게 보면 악의적인 댓글이었다. 그 글을 쓴 자 역시 불임 수술을 시켜야 한다는 글을 쓴 자와 같은 부류일 것이 분명하다. 경계선 지능을 저능한 괴물을 바라보듯 하는 시각. 우리와 같은 사람이나 최소한 우리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는 무자비한 시각.

  아주 드문 드문, 몇 개의 공인된 영상이나 게시글 밖에 안 보는데도 이런 글을 발견하는 것을 보면, 공인되지 않고 익명성이 더 활발한 커뮤니티나 인터넷 공간에서는 얼마나 더 심한 글들이 달리고 그 글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인간의 경멸이란 감정 역시 본능임을 안다. 그 본능을 가진 사람들이 일반의 탈을 쓰고 얼마나 많을지도. 나를 스쳐가는 저 앞의 사람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안다. 인간의 본능은 저열하다는 것을.


  유럽의 한 미술관에서 행위 예술이 있었다. 행위예술가로 유명한 여성 예술가의 퍼포먼스가 충격적이었다. 여성 예술가는 의자에 앉아있고 거기에는 나에게 어떤 행동을 해도 된다는 단서가 달려있었다. 그리고 여자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어떠한 행동을 해도 무생물처럼 가만히 있는다. 이 예술의 끝은 극치였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는 예술가는 온갖 추잡한 짓거리의 대상이 됐다. 여자의 상반신이 그대로 노출되고 여자에게 몹쓸 짓을 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자신이 그 예술을 주도하고 거기다 각오까지 있었을 예술가는 눈물을 흘리며 공포에 질렸다. 퍼포먼스가 끝나고 여자의 몇몇 머리카락이 하루 만에 하얗게 샜다고 한다. 인간이 극도의 공포를 느끼면 머리카락이 샌다고 하는데 여자는 얼마나 극한 공포를 느낀 걸까.


  이 예술 행위에 물론 여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여자를 보호하려 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아주 많았다. 그 사람들은 여자의 예술이 끝나자 모두 도망갈 정도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 이야기는 내 이야기와 결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고 본다.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든 가만히 있는 여자는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없다 라고 판단한 사람들 중의 다수는 악한 행동을 했다. 자신보다 약하면 인간은 악한 강자가 된다.


  내가 사회에서 일하며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경계선 지능을 조롱하거나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도 그들과 다르다 할 수 있을까? 경계선 지능을 지능이 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는 시선, 아이큐 몇 이하는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피라미드를 그리듯 아이큐를 도표화하고 일반화한 외국의 유명한 대학교수. 그들의 시선과 주장이, 불임수술, 극단적 선택 운운한 댓글러들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심하면 유럽 미술관의 몹쓸 인간들 같은 인간까지 만든다.


  경계선 지능이면 극단적 선택을 할 거 같다.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하는 부류들을 지원해 주는 대가로 불임 수술을 시켜야 한다.라고 말한 인간들을 실제로 보면, 사회적으로 거대한 부를 창출하는 일이 아닌, 그 밑의 밑의, 그저 그런 일을 하루하루 하며 살아가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일 것이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경계선 지능을 자신보다 저능한 인간으로 취급한다. 어쩌면 그들은 생각할지도 모른다. 특출 난 지능도 아니고 똑똑하지 않은 자신들보다 더 아래의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자신들은 그들보다 우월하다. 무시를 받는 치욕이 있는 것처럼, 무시를 하는 데서 오는 희열이 있을 것이다. 무시는, 자기보다 아래의 사람한테 하는 행동이기에, 평범하게 멍청한 자신들보다 더 멍청한 인간을 무시로 몰아가며 희열을 느끼고 자신들은 그래도 정상이라는 안도감을 느끼며 존재감을 얻는 그들. 그들 역시도 자신보다 더 낫거나 우월한 상위의 인간들에게 열등감을 심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 열등감의 배출을 경계선 지능들이라는, 본인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대상에게 할 뿐이다. 결국 경계선 지능에게 편견을 갖고 무시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불쌍하게도 열등한 사람들이다. 진정으로 우월한 사람들은 열등함에 골몰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시를 하지 않는다. 열등함을 심하게 느껴본 적이 없기에 자신보다 낮은 대상을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며, 이 글을 끝으로 내가 발견한 저열한 글들을 잊으려 한다. 그리고 경계선 지능이면 극단적 선택을 할 거 같다는 이에게, 여기서라도 맞받아치고 싶다. 당신이야 말로 생활고나 열등함으로 극단적 선택을 할 생각을 해 본 건 아니냐고. 불임 수술을 해야 한다는 익명에게도 한마디 한다.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글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쓰는 당신을 먼저 불임시켜 당신 같은 인격을 가진 인간을 태어나게 해서는 안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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