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김윤식 교수를 기억하며
언젠가 보았던 인터뷰 영상이 기억난다. 영상은 한 노인과 노인의 서재를 비추고 있었다. 영상 속 노인의 서재에는 갖가지 책들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노인은 기자에게 몇몇 자료들을 꺼내주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필기구와 원고지. 하나같이 오래된 것들이었다. 노인은 낡은 책상 위로 자신의 평론 원고를 펼쳤다. 누렇게 뜬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노인의 안경테가 미세하게 떨렸다. 낡은 책상 앞에 구부정히 앉은 노인은 임화와 루스 베네딕트, 김애란과 허수경 등 인생에 마음 닿는 작가들을 회고했다. 그리곤 또다시 잠잠하게 숨을 쉬었다.
기자는 물었다. 문학에 평생을 바치셨는데 후회는 없으시냐고. 노인은 기자를 힐끗 쳐다보고는 주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후회도 그런 것도 없고 그냥 그렇게 되고 말았어.”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꿈 같은가 현세의 거친 들에서 그리 예쁜 일이라니”
시인의 말처럼 지나간 일은 언제나 꿈만 같다. 지나간 일을 떠올릴 때에 나는 스스로의 모습조차 망각한 채, 먼 옛날의 어느 먹먹한 동산으로 가 동그란 마음을 풀어 누인다. 기억의 묘사 속으로 들어가 눈을 떠도 눈을 감은 것처럼 잠시라도 숨이 멎으면 “현세의 거친 들”도 어느 날의 이야기로 아름아름 흩어진다.
유형한 것으로 무형한 것을 다루는 일은 정말로 자기만족밖에 남지 않는다. 대부분의 발길은 스치듯 지나가고, 멈춰 선 발길은 서서히 죽어간다. 문학이 잊혀질 때 미술은 고립되고, 미술이 고립될 때 음악은 사라진다. — 창작자 본인에게조차 — 그럼에도 누군가는 자신으로 물드는 자신만의 세상 속에서 세상이 흘리는 봉숭아 꽃잎 이리저리에 스미 듯이 살아간다.
사람에게는 언제고 ‘무엇을 위해 살아왔느냐’보다 ‘무엇으로 살아가느냐’가 소중할지 모른다. 미운 햇살로 잠에서 깬 어느 날의 재채기에도 전날 밤이 가려놓은 오선지 속 거품들은 가라앉지 못했다. 꽃 한 송이 받기 위해 사는 삶은 어디쯤에 스러질까. 꽃 한 송이 받기 위해 사는 삶보다 한 송이 꽃 선물의 기쁨으로 사는 삶이 어여쁘지 않았던가. 당연하지 않은 내가 숨을 쉬며 당연한 건 무엇인가. 한 자락의 새로움이 피고 지는 지난날은 봄이었다. 그 이름에 매달리는 미련도, 회한도 몽롱한 정신 어귀로 이제는 바라볼 뿐, 살아있다는 건 어디서든 죽어간다는 것이다.
자연한 선택지로 나는 그렇게 살아간다. 저어하게 따라드는 소박한 성실함이 하루하루 내 안에도 곯을 수만 있다면, 돌이키기 싫어지는 지난날을 회상할 때, 세상 물들인 시림으로 나 또한 말해보리라.
“그냥 그렇게 되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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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1936~2018)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대한민국의 원로 문학평론가로, 학계에서는 김현, 김우창, 유종호와 더불어 한국 4대 평론가라 불렸다. 그는 금기시됐던 KAPF(일제 시절 활동했던 좌익 문인 단체)문학 연구를 비롯해 한국 근현대 문학사의 기틀을 마련했다.
본 글에 언급된 인터뷰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eEgyN7cr_gU
허수경 (1964~2018)
허수경은 경남 진주 출신의 시인이다. 그녀는 경상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대학교 고대근동고고학과 박사과정을 밟았다. 1987년 '실천문학'에 '땡볕' 외 4편의 시를 발표하여 등단하였으며 2001년 제14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2018년에 위암으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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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 허수경 (1964~2018)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꿈 같은가 현세의 거친 들에서 그리 예쁜 일이라니
나 돌이켜 가고 싶진 않았다네 진저리치며 악을 쓰며 가라 아주 가버리라 바둥거리며 그러나 다정의 화냥을 다해
온전히 미쳐 날뛰었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 등꽃 재재거리던 그 밤 폭풍우의 밤을 향해
나 시간과 몸을 다해 기어가네 왜 지나간 일은 지나갈 일을 고행케 하는가 왜 암암적벽 시커먼 바위 그늘 예쁜 건 당신인가 당신 뿐인가
인왕제색커든 아주 가버려 꿈 같지도 않게 가버릴 수 있을까,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내 몸이 마음처럼 아픈가
(시집 혼자 가는 먼 집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