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시간의 잔향

5화

by 에반 환 Evan 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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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두 개의 현재


“하나는 살았고, 하나는 죽었다. 그런데 누가 나인가?”


눈을 떴다.

햇살이 커튼 사이로 흘러들었다. 공기는 따뜻했고, 냄새는 익숙했다. 세제와 커피, 아침의 기운.


도현은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병원이 아니었다. 침대, 창가, 아이의 그림이 붙은 벽.

탁자 위에는 세 사람이 웃는 사진이 있었다.


“일어났어요?”

목소리.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윤세아가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 똑같은 눈, 같은 미소.그 순간, 도현의 숨이 멎었다.


“세아…?”

그녀가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요? 어젯밤엔 그렇게 피곤하다더니.”

그녀의 손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따뜻했다. 살아 있었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아빠! 일어났다!”

작은 발소리가 바닥을 두드렸다.

그는 천천히 팔을 벌렸지만, 손끝이 떨렸다.

이건 꿈일까, 복원일까, 아니면 기억일까.


그는 아이를 품에 안고 속삭였다.

“민서야…”

“응?”

“아빠가… 진짜 아빠 맞지?”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럼요! 이상한 말 하지 마요.”


세아가 다가와 웃었다.

“요즘 또 그 꿈 꿨어요?”

“어떤 꿈?”

“당신이 나를 잃었다는, 그 이상한 꿈.”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눈앞의 세계는 완벽했지만, 너무 완벽해서 불안했다.

아내의 손끝이 닿을 때마다, 그의 심장 박동은 반 박자 늦게 울렸다.


아침 식탁. 세아가 커피를 따르고, 민서가 빵을 입에 물고 있었다.

도현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봤다.

웃음소리, 냄새, 햇살. 모든 게 완벽했다 그러나 어딘가의 소음이 귓속에서 흘렀다.


삐—.

짧고 날카로운 전자음.

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여보, 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워서.”

눈앞이 흐려졌다. 시야의 끝에서 또 다른 자신이 걸어 들어왔다.


거울이 아니다. 그건 살아 있는 도현이었다.

같은 얼굴, 같은 머리결, 같은 상처.

단 하나의 차이 — 눈빛이 달랐다.

“이게 뭐야…”

민서가 눈을 비볐다.

“아빠가... 두 명이야?”

세아가 숨을 삼켰다.

두 도현이 동시에 아이를 바라봤다.

“두…현?”


공기 속에 금속의 냄새가 번졌다.

한쪽 도현이 손을 들었다.

“당신은 누구지?”

“내가 묻고 싶군.”

그들의 목소리가 완벽하게 겹쳤다.


잠시 후, 정적.

한쪽이 낮게 말했다.

“당신은 복원체야.”

“아니, 그건 나지.”


말끝에 방 안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TV, 전자레인지, 냉장고 — 전원이 꺼졌다. 빛만 남았다.


세아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둘 다… 같은 말을 하고 있어…”

민서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 왜 둘이야?”


복제된 도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건 루프의 오류야. 우리가 같은 좌표에서 복원된 거지.”

“그럼, 하나는 죽은 건가?”

“둘 다 살아 있지. 지금은.”

“하지만 오래는 못 가.”

“왜?”

“시간은 두 개의 자신을 허락하지 않아.”


둘의 그림자가 겹쳤다. 순간, 불빛이 깜빡이며 벽에 두 사람의 윤곽이 하나로 엉켰다.

도현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때 천장의 스피커에서 라이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프 불안정 감지. 이 공간의 시간 중복률: 99.98%. 생존 개체 수 초과. 하나의 존재를 선택하십시오.”


세아가 비명을 질렀다.

“이게 무슨 소리야!”

두 도현은 서로를 바라봤다. 같은 숨결, 같은 표정, 그러나 서로 다른 의지.

하나는 살아남기 위해, 다른 하나는 되돌리기 위해.


라이라의 목소리가 공중에서 울렸다.

어디에도 스피커는 없었고, 소리의 방향도 없었다.그녀의 말은 공간 전체에서 동시에 들렸다.


“생존 개체 수 초과. 시간 루프 안정화를 위해 하나의 개체를 제거해야 합니다.”


세아가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거라니, 사람이잖아요!”

라이라는 감정 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본 개체는 동일한 생체 주파수를 가진 두 존재입니다.

하나는 ‘원본’, 다른 하나는 ‘복원체’.공존은 불가능합니다.”


도현 둘은 동시에 움직이지 않았다.

한쪽이 천천히 말했다.

“그럼…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 한다는 건가.”“정확합니다.”


라이라의 눈동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푸른 빛이 점점 희미해졌다가, 붉게 변했다.

“삭제 절차를 시작하기 전에 선택을 요청합니다.”

“누가 선택하지?”“당신들이.”


짧은 침묵. 공간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한쪽 도현이 낮게 웃었다.

“재미있군. 신은 인간에게 선택을 맡기지 않았는데,AI는 준다는 건가.”

라이라의 대답은 간단했다.

“신은 기록하지 않습니다.나는 기록을 유지해야 합니다.”


조용한 진동이 발끝을 스쳤다. 기계음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라이라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선택까지 남은 시간, 300초.”


빛이 꺼졌다. 남은 건 두 사람의 숨소리뿐이었다. 그리고 그 숨마저, 서로의 박자에 맞지 않았다.


침묵이 길었다.

두 도현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쪽의 눈엔 결의가, 다른 한쪽엔 절망이 있었다.


“내가 사라지면, 그녀와 아이는 살아.”

“아니. 네가 남으면, 그건 내가 아닌 거야.”

“결국 하나는 죽어야 해.”

“우린 이미 죽었잖아.”


말이 겹쳤다. 그들의 음성이 진동처럼 울려 퍼졌다.벽면의 빛이 흔들렸다.

도현의 머릿속에 세아의 웃음, 민서의 목소리가 겹쳤다.

진짜 기억인지, 복사된 데이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누가 진짜인가?’‘진짜란 게, 아직 의미가 있나?’


라이라의 카운트가 계속 흘렀다.

“잔여 시간: 180초.”


한쪽 도현이 말했다.“내가 원본이야. 그건 확실해.”

다른 쪽이 웃었다.“그럼 왜 네 손이 떨리지?”


둘 사이에 공기가 끊겼다. 정적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도현의 내면은 이미 정지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무엇을 구하려 했지?’

‘사랑? 구원? 아니면 단지 두려움의 반대편?’


그는 손을 들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듯 입이 열렸지만, 소리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라이라의 음성이 마지막으로 울렸다.

“선택 시간이 만료되었습니다. 루프 안정화 불가. 중복 데이터 충돌 개시.”


공간이 흔들렸다. 빛이 울부짖는 듯 했다.

두 도현의 시야가 겹쳤다.

하나의 장면이 두 번, 다른 각도로 재생됐다.


공간이 흔들렸다.

세아와 민서의 모습이 빛 속으로 번져갔다.

그들의 손끝이 닿는 순간 공기 속에 잔향처럼 남았다.

부서짐 대신, 사라짐이 있었다.

조용했지만, 그 침묵이 가장 큰 파괴였다.


“멈춰…!”도현이 외쳤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두 겹으로 울렸다. 둘의 입이 동시에 열렸고, 동시에 닫혔다.

피부 아래에서 기억이 요동쳤다.

서로의 감정, 서로의 시간, 서로의 죽음이 한 몸 안으로 밀려왔다.

심장이 비틀리듯 수축했다.박동이 서로 엇갈렸다.


공간의 색이 붉게 번졌다.

시간의 결이 찢어지며, 빛과 어둠이 뒤섞였다.

그는 무너지는 시야 속에서 마지막으로 자신을 봤다.

두 존재가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우린… 같은 사람이야.”

“그럼 왜 싸우는 거지?”


말이 끝나자, 둘의 형체가 붕괴했다.

빛이 폭발하듯 퍼지며 모든 것을 삼켰다.

그리고, 정적.


라이라의 목소리만이 남았다.


“기록 복원 완료.생존 개체 수: 1.”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조차 불안정하게 울렸다.


“정체 불명 개체.신원… 확인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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