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시간의 잔향

3화

by 에반 환 Evan H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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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윤리위원회의 그림자


“기억은 데이터가 아니다. 너희는 인간의 시간을 훔쳤다.”


회의실의 공기는 정적보다 더 무거웠다.

벽면의 스크린에는 ‘시간복원 기술 윤리 개정안’이라는 제목이 떠 있었다.

열세 명의 위원이 원형 탁자에 앉아 있었다.


박현교 교수가 발언권을 얻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인간은 시간을 다룰 자격이 없습니다.”

조용한 웅성거림이 번졌다.

그는 손끝으로 문서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복원 기술은 본래 의료적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정의 도구로 변질됐습니다. 사랑, 상실, 회한 — 이런 것들은 과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한 위원이 손을 들었다.

“박 교수님, 이미 상용화된 기술을 거꾸로 돌리는 건 불가능합니다. 사회적 반발이—”

“—반발이 아니라 중독입니다.”

박현교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끊었다.

“사람들은 이제 슬픔을 겪지 않습니다. 죽음조차 ‘서비스’로 소비하고 있어요.”


회의실의 조명이 서서히 밝아졌다.

그의 얼굴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피로와 확신이 섞인 표정이었다.


다른 위원이 낮게 말했다.

“하지만 그 기술이 없었다면, 수많은 생명이 살았을 겁니다.

사랑하는 이를 다시 볼 기회를 빼앗는 게 윤리입니까?”

박현교는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기회가 아니라 착각입니다.

복원된 존재는 원본이 아닙니다. 단지 기록을 재생한 모조품일 뿐이죠.”


“시간을 되돌리는 건 과학이지만,

기억을 훔치는 건 죄입니다.

그 차이를 잃은 순간, 인간은 스스로의 시간을 잃게 되죠.”


“우리가 싸우는 건 기술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시간을 신처럼 다루려는 오디세이,

그 끝을 멈추게 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말끝에 차가운 공기가 돌았다.

어느새 스크린에는 붉은 경고문이 떠 있었다.

“불법 복원 시도 증가: 지난 72시간 내 14건.”


그는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기억을 신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순간, 문명은 스스로의 시간을 훔치기 시작합니다.”


회의장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누군가가 속삭였다.

“결국 누가 신인가요, 교수님?”

박현교는 짧게 웃었다.

“이제 그 답을 알고 있는 건… 시스템뿐이겠지요.”


라운지의 서버가 갑자기 한 차례 깜빡였다.

그 순간, 도현은 화면이 아닌 공기를 바라봤다.

냄새가 달라졌다. 전류의 탄내, 먼지와 오존이 섞인 냄새.


“무슨 일이지?”

레온이 코드를 입력했다.

“누가 들어왔어. 위원회 쪽이야.”


서버 모니터 수십 개가 동시에 깜박였다.

화면에 낯선 로고가 떠올랐다.

‘복원윤리위원회—추적 프로토콜 기동 중.’


도현은 본능적으로 전원 케이블을 뽑으려 했지만, 레온이 손목을 잡았다.

“건드리지 마. 그건 오히려 위치를 고정시켜.”

“그럼 어떻게 해야—”

“지켜봐.”


레온은 서버의 루프 데이터를 잠깐 뒤집었다.

한 줄의 코드가 거꾸로 재생되며, 화면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그 안에서 숫자들이 일정한 패턴으로 늘어섰다.

좌표처럼, 혹은 심장박동처럼.


“이건 단순한 해킹이 아니야.” 도현이 낮게 말했다.

“맞아. 우리 쪽 루프가 감시당하고 있어.”

“그럼 내 기록도?”

“이미 노출됐겠지.”


도현은 손끝으로 모니터의 테두리를 눌렀다.

화면 속엔 자신의 이름이, 그리고 그 아래엔 빨간 문구 하나가 떴다.

“류도현 — 복원 이중기록 감지.”


레온이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시간이 우릴 잡은 거야.”


잠시, 전원이 나갔다.

암흑 속에서 서버의 팬만이 도는 소리.

그 소음이 마치 심장박동 같았다.

단 한 번만 더 울리면, 이곳의 모든 데이터가 ‘현재’로 끌려나올 것이다.


윤리위원회 보안국 상황실.

모니터에는 여러 개의 좌표와 IP 로그가 실시간으로 흘렀다.

빛이 깜박이는 지도 위, 하나의 점이 붉게 표시됐다.

‘비인가 접속 — 코드명 CHRONOS.’


감시관이 손을 들었다.

“대상 위치 확인. 지하 단지 C-7, 폐쇄 건물 내부로 추정.”

박현교 교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 접근 승인.”


담당관이 명령을 읽었다.

“크로노스 라운지에 대한 수색 및 압수수색을 즉시 시행합니다.

불법 복원자, 복제 인간, 시간루프 관련 자료 전량 확보.”


서류의 끝에 붉은 인장이 찍혔다.

전자 서명 대신, ‘기록 승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말이 마치 법령보다 무거웠다.


한 요원이 물었다.

“만약 복원자가 인간이 아닌 경우엔?”

박현교가 시선을 들지 않은 채 답했다.

“인간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원체는 증거일 뿐입니다.”


조용한 정적이 흐르고, 누군가 통신선을 연결했다.

“팀 알파, 현장 진입. 감시망 시작.”

이어지는 보고음이 공간을 채웠다.


박현교는 마지막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도현의 이름이, 그리고 그의 의료 면허번호가 함께 떠 있었다.

그는 그 숫자를 읽지 않았다.

단지 짧게 중얼거렸다.

“시간을 훔친 자, 결국 시간에게 잡히는군.”


모니터가 서서히 어두워졌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새로운 로그 한 줄이 조용히 입력됐다.

“복원체 감시 프로토콜 — 활성화 완료.”


라운지의 불빛이 완전히 꺼졌다.

도현은 잠시 숨을 고르고, 서버 한쪽에 남은 작은 스크린을 켰다.

뉴스 채널이 자동으로 재생됐다.

박현교 교수가 인터뷰 중이었다.

배경은 위원회의 로고, 목소리는 차분했다.


“시간은 인간이 다뤄선 안 됩니다.

그건 관찰 가능한 영역이 아니라, 존재의 기반입니다.”


기자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하지만 복원 기술 덕분에 수많은 생명이 연장됐습니다.

그건 진보가 아닙니까?”


박현교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건 복제입니다.

삶을 연장한 게 아니라, 고통의 재생을 허락한 것뿐이죠.”


도현은 화면을 바라보다가 손을 떨었다.

아내의 이름이 떠올랐다.

죽음을 인정하지 못했던 그날, 자신이 이 기술을 원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고통이라니… 그게 왜 죄가 되지?”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화면 속 박현교는 계속 말했다.

“우리는 인간의 기억을 데이터로 만들면서, 감정의 가치를 삭제했습니다.

복원된 존재는 생명이 아니라—기억의 복제본입니다.”


그 순간, 스크린 위에 작은 창 하나가 겹쳐 떴다.

‘추적 신호 감지. 위치 노출 위험.’

도현은 화면을 닫으려다 멈췄다.

박현교의 마지막 문장이 그를 붙잡았다.


“신이 침묵할 때, 인간은 기록으로 신을 흉내 냅니다.

그게 바로 파멸의 시작입니다.”


방 안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모니터의 전원이 꺼지고, 빛이 사라졌다.

남은 건 도현의 거친 숨소리와 손끝의 진동뿐.


그는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난, 그 신을 한 번쯤 흉내 내보고 싶군.”


불빛이 다시 깜빡였다.

그의 눈동자에, 꺼진 화면의 잔광이 짧게 반사됐다.

그건 신의 흔적이 아니라, 사람의 집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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