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감 중독 사회저자안도 슌스케출판또다른우주발매2023.03.02.
안돈 슌스케는 세계적으로 앵거 매니지먼트로 알려진 사람이다. 앵거 매니지먼트라는 분야가 있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았다. 일본 사람이라는 편견일 수도 있는데 그들은 작고 섬세하다 그래서 신선하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일반화할 줄 아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화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당신의 분노는 무기가 된다>
의 저자이다.
1.
우리에겐 마녀사냥의 무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마녀로 몰려 화형을 당한 많은 마녀들이 사실은 마녀가 아니라 똑똑한 여자였다는 것을 말이다. 당시 사회에서 두고 봐주고 싶지 않은 여자를 마녀로 몰았다는 것을 말이다. 가장 최근에는 아마 이선균 사건을 들수 있을 것 같다. 마약을 했다는 주장, 그로 인해 '올바르지 않은 그'에 대해 우리의 손가락과 입은 끊임없이 그를 몰아 세웠다. 원인은 모르지만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제서야 우리는 휴하고 한숨을 몰아쉬면서 손가락과 입을 멈췄다. 그는 죽었고 우리는 아무일 없던 듯이 일상은 흘러간다.
우리가 정의감에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재단하고 단죄하지 말아야 이유는 '정의'를 내세우는 그 이면에 나의 열등감이 작용할 수도 있고, 나의 결핍이 작용할 수도 있고, 혹은 내 이익을 관철하고 싶을 수도 있고 아니면 꼬락서니가 아니꼬와서 봐주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 내가 좀 폼나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다른 누군가를 지목하면서 나는 일반 다수와 같은 그룹이라는 그룹핑의식을 단지 느끼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집단에 소속하고 싶은 의식은 인간의 무의식속에 잠재해 있는 본능에 가까운 의식이니 검지 이외의 네 손가락의 한팀에 속했다는 의식은 인간의 안정감을 충분히 충족시킨다.
2. 정의감이란?
정의를 영어로 하면 justice 이다. 정의감은 a sense of justice 이다.
공정성이나 형평성의 의미의 정의가 아니라 정의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정의감이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옳다고 믿는 핵심 믿음에 기반하여 다른 사람과 세상을 재단하고 평가하고 고치려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즉 나와 다른 사람을 그 자체로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 습관, 배움 것에 기반하여 틀렸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고치려는 태도를 말한다.
그래서 자신은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인권이나 생명의 가치 이외의 부분에 대한 정의나 올바름에 대해 사람마마 생각이 다를 뿐만 아니라, 시대나 상황에 따라 변하는 부분이 있다. 과거에는 허용되지 않았던 것도 지금은 허용되는 부분도 있고, 과거에는 허용되었던 것이 지금은 허용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정의가' 로 다른 사람과 세상을 재단할 때 '정의감 중독' 상태가 된다.
3.
" 정의감에서 비롯되는 분노는 산acid 이다." - 마크 트웨인
정의감에서 비롯된 분노는 상대방을 죽이기 전에 자신을 먼저 부식시킨다. 화의 가장 큰 피해자는 자기 자신이다. 화를 내는 이유는 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핵심믿음에 기인한다. 자신이 정말 옳다고 믿는 믿음이 훼손당하거나 아니면 부정되는 상황이 오면 사람들은 참지 않고 화를 낸다. 그런데 ' 핵심 믿음'자체를 지킬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자신이 '믿음이 곧 나'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생각은 내가 아니다. 나는 생각의 주체이지만 생각이 곧 나는 아니다. 나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일으킬 수 있는 생각의 주인이다. 내가 지금 옳다고 믿고 있고, 지키고 싶은 지 생각이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는 경우 옳지 않은 것이 되고, 그래서 지키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 판명되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
4.
'트롤리 기차'라는 딜레마가 있다.
제동 장치가 망가진 기차가 선로 위를 달리고 있다. 선로 위에는 5명의 사람이 있어 선로를 바꾸지 않으면 5명이 죽게 되고 선로를 바꾸면 5명은 살지만 바꾼 선로에 있는 사람 1명은 죽게 된다. 분기 스위치는 당신 앞에 있다. 스위치를 어떻게 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1명을 죽게하는 선택을 한다고 답했다. 그게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질문을 해보자 "그 한 사람이 당신의 가족이라도 그런 선택을 하겠는가?" 라고 말이다. 이런 경우라도 가족을 죽이겠다고 답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의 기준이 달라지는 순간이기도 한다.
트롤리 질문으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당신 앞에 굉장히 뚱뚱한 성인이 서 있고, 그 한 사람을 선로로 밀면 4명을 살릴 수 있다고 전제를 했다. 당신은 그 뚱뚱한 성인을 밀것인가? 라는 질문을 했다.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밀 수는 없다고 했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가족이든 아니든 뚱뚱한 사람이든 아니든, 장애를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모든 생명의 가치는 같다. 현실에서는 가족의 가치를 더 우선 순위에 두기도 하고, 외모나 신체 상태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다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정의의 기준 자체가 달라지는게 아니라 각자가 생각하는 핵심개념이 다를 뿐인 것이다. 즉 모르는 사람보다 가족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건 개개인의 핵심개념이다. 또 외모에 따라 생명의 가치가 다를 수 있다는 생각도 실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핵심가치나 정의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5.
물론 강한 신념을 가질 때 인간의 뇌에는 도파민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강한 신념을 가지면 힘이 나고 기운이 나는 것인가보다.
히어로 영화를 보면 히어로들이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 오직 앞만 보면서 질주할 때 옆으로 스러지는 많은 '민간인'들이 있다. 시장이 좌판이 부서지고, 길을 가는 행인이 넘어진다. 가게의 간판이 떨어지고 유모차안의 아이는 내팽겨쳐진다. 강한 신념을 가지고 질주하는 것은 일견 아름답지만 그의 뜨거운 열기로 인해 데이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여 한다. 강한 신념을 가지고 뚝심있게 나아가는 사람이 멋있어 보이지만 그 뚝심에 상처받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같다. 나의 신념이 설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가능성을 열어둬야 할 것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인정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항상 해야 할 것이다.
도파민의 힘으로 신념을 지키기 보다는, 내가 틀릴 수도 있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우리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극복하는 길인 것 같다.
6.
다른 사람들과 교류를 멈추고 고립되는 경우 잘못된 정의감에 중독되는 경우가 많다. 일제 시대에 가미가제 특공대나, 이차대전 당시 히틀러에 맹목적이었던 나찌즘 신봉주의자들이 있다. 나찌주의에 빠졌던 많은 사람들은 사실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사회성이 결여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나 아렌트가 말했다. 고립되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의 비판이나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고 '일정 틀'의 모양대로 그냥 성형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의견을 서로 주고 받고, 서로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수용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사람은 한가지 생각을 하면 그 생각만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를 확증편향사고라고 한다. 항상 옆 사람들과 대화를 멈춰서는 안되는 것이다.
7.
' 이 한 몸 불살라서' 나 자신이 아닌 그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도 경계해야 한다.
지인 중에 퇴직과 함께 허무가 찾아왔다고 한다. 젊은 시절부터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바친 직장이었다. 자신의 건강을 뒤전으로 하기도 했고 가족과의 시간을 뒤로 미루기도 하면서 열정을 바친 곳이었다. 자식이 갑자기 아파서 응급실로 가는 상황에서도 회식 자리를 빠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파서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면 된거지 '나'도 병원에 함께 가 있어야 하는건 아니지 않은가. 내가 놀면서 안간것도 아니고 다 먹고 살자고 못간건데 자신을 원망하는 와이프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와이프로부터 실망스럽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고 한다. 자식 데리고 응급실 가는 마음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고 그때 같이 가자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남편밖에 없는데 그때 당신은 회식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리 약속된 클라이언트와의 자리라 피할 수가 없었고, 와이프는 혼자 감당할만한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라는게 또한 자신의 이유였다. 그런 일로 인해 둘의 거리가 많이 멀어진 건 사실이다.
이제 그 지인은 자신이 삶을 바친 직장에서 물러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지인은 그런 사실은 당연히 알겠는데 감정적으로는 수용하기 어렵고 그러다보니 감정적으로 마음 한 구석이 텅빈것 같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그 시점- 자식을 데리고 응급실로 뛰어가야 하는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것 같다고 말을 한다. 현재의 선택이 미래에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인지는 아무도 모르는거 아니냐는 말도 덧붙인다.
순간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것이다. 즉 그 순간에는 직장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건 일종의 보편적인 선택이라는 말이었다.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지 않고 그 무엇이 되는 경우가 많다.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수도 있고, 아니면 세상의 눈일 수도 있다. 나를 버리고서 얻고자 했던 돈이나 명예 또는 세상의 평판이 당시에는 나의 정의일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그 돈이나 명예는 나에게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더욱이 세상의 시선은 더말할 필요가 없다. 세상에 자기 자신이 있은 다음에 그 무엇이 있는 것이지, 자신을 바치면서까지 얻을 무엇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키고 싶은게 있다면 정성과 최선을 다해 살아남아서 그 무엇을 지켜야 옳은 것이다. 일일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자신에게 중요한게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찰하는 태도이고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 그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동의를 얻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8.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서 돈과 시간을 온전히 쏟아 붓는 경우가 많다. 부모들에겐 자식이 '정의'가 된다. 자신의 삶의 성적표를 자신의 성공으로 대치하고, 자식의 성공을 자신의 성공인양 기뻐하고 자식의 실패를 자신의 실패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많은 돈과 시간을 자식을 위해 써야할 때가 있긴 있는 것 같다. 아주 어릴 때야 말할 수도 없고 자식이 아픈 경우도 마찬가지다. 적어도 그 시기를 벗어나면 서로 공존하고 동행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자식을 대하는 태도도 아이가 커감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부모에게도 정의는 자식이 아니라 각자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9.
내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제자 중에 정말 소극적이고 자기 연민이 강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방안에 홀로 들어앉아 있었고, 외향적이고 적극성을 가진 친구들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성격을 바꿔보라고 조언도 해보고, 친구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시도도 해봤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오히려 그 아이의 성격을 인정하고 그 성격을 장점으로 보도록 하는 것이더 나았다. 아이의 소극적인 성격을 섬세하고 치밀함으로 생각하도록 사고의 전화을 하게 하고, 많은 친구보다 적은 숫자의 깊은 관계를 맺도록 하거나 친구들과의 시끌 벅적한 관계보다 자신의 일에 집중을 하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아보라고 조언을 하니 그 제자가 더 편안해했다. 그 제자를 변화시킬 순 없었지만, 그 아이를 보는 우리의 관점이 변했다. 그 제자도 자신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나, 상황을 바꾸는 것은 어렵다. 그것보다 자신의 생각과 관점과 행동을 바꾸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10.
정의감 중독을 벗어나려면 '사람과 사건에 대한 허용도'를 낮춰야 한다. 사람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으면 사람이 다다가기 힘들어진다. 이것 아니면 저것 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명확하고 확실하고 기준이 명확할 순 있지만, 그것인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오히려 이것과 저것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지대에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 사람들은 이러해야 하고, 자식은 저러해야 하고 등등의 사고에서 조금만 벗어나서 여유를 가지면 좋을 것 같다.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다른 생각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옳다고 믿기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물론 나의 정의감이 보편적으로 다른 사람에도 인정이 되고, 사회의 변화를 꾀하는 경우도 사실 있다. 그런 정의감과 거기에서 비롯된 분노는 사회를 개혁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럴 때 ' 나의 분노는 무기가 된다.'
나의 개인적 정의감과 무기가 되는 분노와 정의를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11.
그래서 정의를 내세우기 전에, 혹은 정의를 내세우는 동안에도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췄는지를 스스로 자문해봐야한다. 예의를 갖춰야 하는 대상은 자식일수도, 가족일수도, 아니면 동시대의 사람일 수도 있다. 인간에 대한 공감과 이해 거기에서 시작하는 인간에 대한 낙관적 기대는 우리 자신의 정의감 중독을 벗어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정의감 중독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정의가 시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