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하고 원통하다,
분하고 원통하다-부산함락
-우리들의 이순신전-(1)
최원돈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오후 부산포 앞바다에 일본 배 수백 척이 나타났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의 제1군은 4월 14일 새벽에 상륙하여 골바로 부산진성을 공격했고, 정발에 (153-1592)과 600명의 조선군이 맞섰으나 곧 함락되었다.
이 그림은 임진왜란 첫 전투인 부산진 전투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성벽 위에서 검은 갑옷차림의 장군은 부산진점철제사 정발이다. 이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군사와 백성 대부분은 순절했다.
다음날인 4월 15일에는 동래부사 지키던 동래성도 함락되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군사들뿐만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부분의 백성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일본 측 기록인 요시노 일기에는 "여자를 비롯하여 아이들과 개, 고양이 할 것 없이 모두 죽였다(부산진전투)", 또한 서정일기에는 "그날 3천 명의 목을 베고 5백 명을 포로로 잡았다(동래성전투 )."라는 기록이 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수자기를 앞세우고 맞섰지만 성은 곧 함락되고 말았다. 송상현은
북향 4배 하고 순절하였다.
이 틈을 타고 성밖으로 달아나는 경상좌병사 '이각'의 무리들을 보면 참으로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순절도는 역대 동래부사들이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깨우치며 순절자들을 기리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동래성 전투의 흔적>
1592년 동래성전투의 참혹한 흔적은 400여 년이 지난 2005년 동래읍성 해자가 발견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부산 수안동 지하철 공사과정에서 동래읍성 해자가 확인되었는데, 2005년~2008년 발굴 조사로 이곳에서 다양한 무기류, 인골, 분청사기와 기와 편 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무기의 대부분이 조선의 무기이고 인골이 함께 출토된 것으로 보아, 조선인의 시신과 무기를 해자에 함께 유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래읍성 해자 발굴에서 출토된 화살촉은 모두 자루를 끼우는 형태로 대부분 조선군이 사용한 것들이다. 이밖에도 칼, 숫깍지, 투겁창과 알본무기인 국지창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혹한 것은 이곳에서 출토된 인골들이었다.
동래읍성, 발굴로 드러난 임진왜란의 기억
우리나라 국민 중에 임진왜란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수없이 많은 매체를 통해 임진왜란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많은 역사서에 임진 해란의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의 모습은 기록의 역사인 것이다.
그러면 고고학 발굴을 통해 임진왜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유적은 없을까? 아쉽지만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적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곳은 사실상 없다.
그러나 2006년 부산에서 동래읍성 해자(垓字)가 발굴되면서 임진왜란의 전투지 유적이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동래읍성 해자에 남겨진 왜란의 기억은 어떤 모습일까?
<부산 동래읍성 해자의 발굴>
2006년 부산에서는 지하철 3호선 공사를 위한 문화재 발굴 조사가 한창이었다. 동래구 수안역 일대에서는 동래읍성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존재가 불투명 해자가 확인되면서 큰 주목을 끌었다.
동래읍성은 1446년(세종 휴 28)에 축조된 것으로 "동래읍성은 석성이고 둘레는 397 보이며 우물이 5개 있다."라고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또 "문종 실록에는 "높이는 12-13척이고.(중략) 해자는 파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해자에 대한 기록은 언급이 아예 없거나 파지 않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동래읍성 해자는 존재가 불투명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2006년에 진행된 발굴조사의 첫 번째 성괴는 해자의 존재를 확인한 것 아라고 합 수 있다.
그러나 발굴이 진행되면서 확인된 성과는 더욱 놀라웠다. 해자 내부의 퇴적토 중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2개 층에서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와 관련된 유물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칼, 창, 활, 화살 등 각종 무기류를 비롯하여 갑옷과 투구가 매우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무엇보다 수많은 인골이 함께 출토되어 등래성 전투가 있었던 역사적 현장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해자에 남은 기억-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무기와 갑옷>
임진왜란 시기에 해당하는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무기와 갑옷은 거의 없다. 우리에게 널라 알려진 조선시대의 무기와 갑옷은 대부분 조선 후기의 것이다.
그중에서도 시기에 대한 치밀한 검토 없이 조선시대 후기의 무기와 갑옷을 조선 전 시기에 적용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서울 광회문광장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의 갑옷을 꼽을 수 있다. 이 갑옷은 두정갑(頭釘甲)인데. 조선 후기에 유행한 갑옷이다.
최근 학계에서는 조선 전기 고위직 장수의 갑옷을 찰갑으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는데, 동래읍성 해자에서 출토된 무기와 갑옷은 역시 찰갑이라는 점을 주요한 증거로 삼고 있다. 이처럼 동래읍성 해자에서 출토된 무기와 값옷은 조선 전기의 무기와 갑옷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투구 역시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투구와는 다른 것이 출토되었다. 조선 전기의 투구는 세종실록에 따르면 차양이 있는 것을 첨주, 없는 것을 원주라고 한다. 동래 읍성 해자에서는 첨주 2점이 출토되었다. 류성룡 투구 역시 첨주의 형태이다.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투구와 같이 투구 위에 삼지창 장식이 달리고 옆드림과 뒷드림이 부착된 투구는 조선후기 것이 확인된다. 투구 또한 갑옷과 마찬가지로 조선후기에 사용된 것에 이에 대한 치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해자에 남은 기억 - 임진왜란의 잔혹함>
동래읍성 해자에서는 수많은 인골이 출토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고고학 발굴은 과거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동래읍성 해자에서 출토된 인골은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전투를 겪은 사람들의 흔적을 넘어 참혹하게 희생된 사람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 그 모습은 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비극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큰 충격에 빠뜨렷다.
인골은 최소 81 개체에서 최대 114 개체가 확인되었다. 발굴이 진행된 해자는 동래읍성 전체를 기준으로 본다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도 아닌 좁은 면적에서 14명의 인골이 확인된 점은 동래성전투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회생되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해자에서 출토된 인골은 동래성전투의 회생지가 군인뿐 아니라 납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점도 보여준다.
인골을 분석한 결과 성별은 남성 59 개체. 여성 21 개체로 확인되었다. 연령은 40대까지 확인되었는데, 충격적인 점은 5세 전후의 어린아이 인골도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남성의 인골이 많은 점으로 전투에 직접 참여한 인원이 많이 희생된 것을 추정할 수 있지만,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여성과 심지어 어린아이 인골까지 확인된 것은 전투 종료 이후에도 많은 희생자 가 발생하였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머리에서 총상이 확인된 인골은 5세 전후의 어린아이로 판정되었다는 점이 놀랍다. 전투가 치열한 당시, 5세 전후의 어린아이가 성벽 위에 노출되어 전투 중에 총을 맞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까? 물론 단정할 수없지만 이 아이는 전투가 종료된 이후 진행된 학살의 과정에서 희생된 것으로 짐작된다. 동래읍성 해자에서 출토된 수많은 인골 중 가장 잔혹 하고 가슴 아픈 흔적이다.
여성으로 판별된 한 두개골에서는 여러 자상이 동시에 확인되어 더욱 충격적이다. 인골에서는 안면부를 자른 자상, 두개골 위쪽을 자른 자상, 머리를 두 차례 강타한 흔적이 동시에 확인되었다. 특히 두개골의 상부에서부터 좌측으로 난자상은 마주 보고 칼을 휘두른 것이 아니라, 두개골보다 높은 위치에서 아래로 내려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마치 처형한 듯한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두개골이 함몰된 인골 또한 전쟁의 폭력성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 역시 얼마나 큰 둔기로 얼마나 강한 충격을 받았는지 보여주는 흔적이다.
이처럼 동래읍성 해자에서 출토된 인골은 동래성전투의 흔적을 넘어 참혹했던 현장에 있었던 사람 그 자체를 보여준다. 자상흔이 총상흔보다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 회생자의 성별 남성과 여성 모두 확인된다는 점, 심지어 5세 전후의 어린아이까지 희생된 점은 동래성전투 종료 이후 백성들을 대상으로 학살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동래읍성 해자의 발굴은 기록으로만 전하던 임진왜란의 역사적 현장이 최초로 드러난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수많은 무기와 갑옷은 조선 전기 군인의 모습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갑옷에 대한 재점토가 이루 어지고 있는 점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동래읍성 해자에는 임진왜란의 참상 또한 그대로 남아 있다. 인골을 통해 확인된 동래성전투의 참혹함은 지금까지 기록으로 알고 있던 것을 아득히 뛰어넘어 우리에게 충격과 두려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발굴된 해자의 범위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수많은 회생자가 땅속에 잠들어 있을 것이라는 점은 40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임진왜란 이 끝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한다.
휘뿌연 겨울 하늘이다.
나 혼자 박물관에 간다. 겨울호수는
얼음에 잠겨있고 멀리 남산타워 전망대가 흐릿하게 다가온다. 내 눈 탓 인가.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들의 이순신'은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아다. 전시장 입구로 들어서니 검은 파도 영상과 새찬 파도소리가 울려 퍼진다. 멀리서 거북선이 넘실넘실 다가온다.
이순신. 언제나 이름만 보아도 숙연해진다. 전시장 안에는 관람객들로 북적인다. 방학이라 가족들과 함께 나온 어린이들, K팝 문화여파로 떠들썩한 관광객들, 남녀노소 국적불문이다. 이순신 전은 그 어느 전시장 못지않게 알차고 탄탄한 가획이라는 생각이든다. 르부르 박물관 못지않다.
나는 '분하고 원통하다, 분하고 원통하다- 부산함락' 코너 앞에 멈춰 섰다. '부산진순절도'를 보며 상념에 잠긴다. 부산진성은 우리의 첫 대문 앞에 가득 찬 왜선과 성 앞에서 조총을 겨누고 있는 왜군들 성위에는 활을 들고 늘어서 있는 조선군의 모습은 중과부적일 수밖에 없다. 사자기(師字旗) 아래 정발 장군의 모습이 측은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치기 위해 15만 8천 명의
군사를 준비했다. 조선은 10만
양병설을 갑론을박하는 사이에 꼼짝없이 우리의 앞마당을 내어주고 말았다.
'동래부순절도'를 보면 더욱 기가 찬다. 동래부사 송상헌은 적군 3만을 관민 4천과 맞서 싸우다 북향사배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더욱 한심한 것은 경상좌병사 이각이 성을 빠져나와 달아났다.
경상좌병사가 어떤 자리인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장수가 적군이 많다는 이유로 달아나다니 기가 막힌다. 도망친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사람을 장수로 내 세운 임금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그는 끝내 참수당했다.
하지만 우리의 "이순신은 4월 16일 부산 합락, 18일 동래 함락 소식을 연이어 받고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이길 수가 없었다. 즉시 관할 지역의 지휘관들에게 전황 소식을 알리고 군사와 병선을 정비해 대비하도록 명령했다. 4월 26일 경상도를 지원하라는 국왕의 명령이 내려을 때까지 이순신은 침착하게 전투 준비를 해나갔다.
이순신은 '분노로 간담이 시들고 아픔이 뼛속에 사무치는' 괴로움을 반드시 승리로 씻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부족한 병력으로 적의 대군에 맞서기에 최적인 출전 시기를 신중하게 가늠했다. 5월 4일 새벽. 이순신은 첫 격전지가 될 경상도 옥포 앞바다로 향했다."
이 전시를 보며 부산함락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만약 조선에서도 10만'양병설'만 갖추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집으로 돌아와 도록을 펼쳤다.
전시장에서 볼 수 없었던 '동래읍성, 발굴로 드러난 임진왜란의 기억'을 읽었다. 놀라운 사실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까지 조선전기의 자료가 없어 잘못된 이순신 장군의 동상에 대한 해설과 '해자에 남은 기억' 임진왜란의 잔혹함_을 읽으면서 '5세 전후의 두개골 총 상흔'과 '함몰된 두개골의 출토 양상'을 보면서 치가 떨린다. 아무리 전쟁이라도 어린아이와 여자를 저렇게 무참하게 학살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밀려온다. 이들은 왜 이곳까지 나와 변을 당했을까.
때는 춘사월 꽃피고 새우는 봄날이다. 엄마는 아가를 데리고 꽃놀이 나왔을까. 아니면 나라의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서 돌이라도 나르려고 나왔을까.
어린아이는 뒤통수에 총상 흔적이 있고 어른은 머리에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다. 무엇에 맞았을까. 이들의 원혼을 어떻게 달래 주어야 하나. 측은하고 예쁜 유골이다. 이들은 해자의 진흙탕 속에서 400년을 지냈다. 어찌 편히 잠들 수 있었을까.
'미안하다 아가야 고이고이 잠들어라.'
이제는 이 땅에 이런 비극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 어느덧 겨울밤 샛별이 빛난다.(2026.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