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2021년 겨울, 그러니까 - 내가 2021년 4월 군번이니까, 군대를 가기 직전의 이야기이다.
그때는 팬데믹 시기였으며,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추웠다.
“시골에 내려가 보는 것이 어떻겠니?” 아빠의 권유였다. 술을 먹고 눈물이 많아진 요즘, 그를 울게 하는 원인이 자신의 과거의 기억 속 모질고, 섬세하지 못한 할아버지이었음을 고백하고 나서였다. 그의 권유는 여러 의미로 괘씸했다. 일단은 자식을 노동력으로 보는 집안의 비극을 이어나가는 권유이기도 했거니와, 현재 시골에서 그가 차지하고 있던 노동력의 일부분을 나에게 전가하기 위한 술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교활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생활에는 생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지는 싸움을 절대로 하지 않기에 나는 항상 피곤한 싸움을 끝내기 위해서 최대한 들키지 않게 지곤 했다. 물론 대부분은 진짜로 이길 수 없었다. 아빠는 본인이 스스로 승부사라고 생각하는 데다가 어떤 싸움도 대충 하지 않았다.
사건이라는 것이 없었다. 아무런 다짐도, 아무런 의지도, 그냥 아무것도 없었다. 1달이 넘었다. 그전의 일상은 3달 동안 반복되었다. 그러니까, 작년 9월부터 지금까지, 이틀 만이 지나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이틀이 지나는 동안 해가 바뀌었고, 계절이 바뀌었고, 어떤 이들은 국가 부름으로 인한 일상에서의 강제 탈출을 당하였다. 이 생활을 계속한다면, 3일째는 아마 나도 “국가 부름으로 인한 일상에서의 강제 탈출을 당하는 것”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빠의 권유는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번 시골로의 탈출은 “나의 나로 인한 강제 탈출”이 좋겠다. 뭐든지 – 자율적인 것보다는 타율적인 것이 편하기 마련이니까. 해야 하는 것을 찾아서 하는 것보다, 하라는 것을 열심히 하는 편이 항상 편했다. 그냥 그렇다.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이것보다 더 생산적인 생활을 한다고 들어왔다. 팬데믹 때문이었다고 하고 싶다. 아무 곳도 갈 수 없었고, 같이 갈 사람도 없었다. 나는 문이 열려 있지만, 밖에 아무것도 없는 감옥에 있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생활은 단순했다. 글을 써야 하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상당 시간 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앞으로 몇 달 뒤에 나에게 생길 큰 변화를 생각해 봤을 때,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아마 꽤나 결연하고 진취적이었던 12세의 고라니 씨가 22세의 고라니 씨의 이런 생활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말했을 거다. “병신”
그전의 일상은 이렇지 않았다. 2019년의 일상은 – 이것보다는 바쁘고, 알차고, 힘들었다. 얼마나 힘들었냐면, 일상에 지친 어느 날에는 이렇게 말해 버린 적도 있었다. “차라리 오늘 시험을 보거나 수업을 할 바에야, 역병이나 돌아서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렸으면.” 2019년의 이진한 씨는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2020년에는 역병이 돌아버렸다. 2020년은 없었던 것 같이 사라져 버렸고, 2021년 1월이 바로 다음으로 와버렸다. 다시 학회에 신입생을 받을 준비를 했고, 학회 운영에 대한 준비를 철저하게 하였다. 2020년과는 다르게 올해는 군대를 가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까먹은 채로 그랬다. 내가 여전히 연극 학회의 회장이고, 올해 10월에 연극을 올릴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척하고, 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나는 여전히 연극 학회를 사랑함으로.
뭔가 일상의 대격변 인해서 바라는 결과물은 대게, 일상 보다 더 건강하고 좋은 생활일 것이다. 심지어 입대를 앞둔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이 가지는 유일한 희망도 그런 거니까. 김병장이 될 김이병을 기다리는 것은, 정신적 후유증과 허리 통증이 큰 지분을 차지하지만 말이다. 현실을 받아들이려면, 적당한 현실 왜곡이 필요하다는 언제나 슬픈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만들기 마련이다. 아직까지 정확히 직시하고 현상을 밟고 넘어가는 강인한 인간을 본 적이 없다. 그냥 그런 척하는 인간이나, 적당히 왜곡해서 상황을 무마하는 사람들만 가득하니까. 이번에 시골에 가면 1주일 정도 있다가 오면 좋겠다.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 도와드리고,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고, 책 많이 읽고, 글도 잔뜩 써오는 것이 좋겠다. 분명히 집에 있을 때보다는 더 좋은 생활이다. 월요일에 출발해서 금요일에 와야겠다. 그렇게 그날도 맥주를 꾸역꾸역 처먹고, 잠을 머리에 구겨 넣으며 생각했다.
일요일은 이런 공상을 하다가 보내 버렸다. 월요일이 되었다. 폭설이 내렸고, 제설 차량 말고는 어떤 차도 돌아다니지 않았다. - 6시였다. 점점 도로는 흰색에서 회색이 되었다. - 7시였다. 차들이 이따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8시였다. 시내버스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 9시였다. 할머니께 시골에 간다고 전화를 했다. - 9시 반이었다. 일상은 나의 탈출을 원하지 않았다. 나는 다시 침대 속으로 스며들었다. – 10시였다. 할머니의 독촉 전화가 왔다. - 11시였다. 시간을 달리다 보니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짐을 싸기 위해서 오랜만에 꺼낸 백팩에는 오래된, 아주 오래된 담배 2개비가 들어있었다. 무시하고 가방을 들고나왔다. 나가면 그 담배가 그리울 것 같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역시나 평택역 앞 흡연 구역에서 그 두 개비가 자꾸만 떠올랐다. 수입이 없는 백수는 담배도 피울 수 없는 것이니까. 어쩌겠어. 그냥 그렇게 지하철역으로 갔다.
연착이다. 12시 9분의 열차는 11분 연착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아마 눈이 많이 와서 그럴 것이다.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2분 뒤에 9분 연착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래서 언제 온다는 건지 헛갈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제 오는데? 9분에서 9분 연착인지, 아님 지금이 11분이니까 지금부터 9분 연착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플랫폼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다음 열차, 그러니까, 나랑 같은 열차를 타는 사람들인 것은 확실했다. 그들은 모든 걸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편안한 표정, 아니 그냥 일상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일상적인 표정, 그러니까 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자연스러웠다. 당연하지, 아마 다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으면, 역에 정차하지 않는 무궁화호의 정면에 오묘한 표정을 한 채로 몸을 던져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열차는 18분에 왔다. 그러니까, 9분에서 9분 연착된 거였다. 평택역에서 온양 온천 역까지. 끝에서 끝으로 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경기도의 끝에서 일호선의 끝자락이니까. 사실 그런 셈이긴 했다. 가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지도 길지도 않다. 40분이다. 아마 30분이었으면 가깝다고 했을 것이고, 1시간이면 좀 멀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40분이라는 시간은, 애매하다. 평택이라는 도시도 그렇다. 아주 오랫동안 살아왔지만, 이 도시는 알 수가 없는 곳이다. 도시인가? 시골인가? 아니면 경기도인가? 충청도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경기도가 확실하다. 행정구역이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경험상 외지인 특히 경상도 출신 사람들은, 충청도라고 생각한다.) 뭐가 유명한가? (평택의 초등학생들은 평택이 쌀이 유명하다고 배우지만은, 쌀을 생각하고 평택을 떠올리는 사람은 평택 사람을 제외하고 본 적이 없었다.) 대체로 외지인들은 평택을 생각하면 미군부대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 미군부대가 있는 것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그러나 40만이라는 인구를 설명하기에 미군부대의 존재라는 이유는 조금 애매한 구석이 있다. 평택의 모든 시민들이 미군 주둔의 경제 혜택 밑에서 생활하는 것은 아니니까.
곤지암에서 온 친구가 이 도시에 대해서 내린 평가는 이렇다. “평택은 무진 같아.” 무진.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는 안개도 없고, 나를 제외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활기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에, 조금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 사는 사람 따라 다르다. 아무런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지 않는 그와 나에게 있어서는, 무기력에 잠식되어버린 주변 환경이 무진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공상을 한두 번 하기에 40분은 매우 적절한 시간이다. 온양 온천 역. 일호선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에 위치한 역. 이런 일호선 – 끝자락의 역들의 특징은 출구가 매우 적다는 점이었다. 아마 역사의 크기는 서울에 있는 건대입구역에 비해서 작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의 여느 역들처럼 입구가 8개씩이나 되는 법은 없었다. 1번 출구는 시내로 나가는 입구이고, 2번 출구는 소위 후문이라고 불리며, 나를 데리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는 만남의 광장 같은 장소이다. 나는 1번 출구로 가야만 했다. 할아버지의 차가 폭설과 연이은 한파로 인해서 방전되었기 때문이었다. 뭐 택시를 타든 버스를 타든 상관없었다. 눈이 많이 내린 시골길은 할아버지 운전자가 차를 끌고 오기에 위험하니까. 차라리 내가 가는 편이 훨씬 낫다. 또 그걸 아는지, 할아버지의 소렌토는 시동이 걸리기를 거부하는 중이었다. 1번 출구 앞에는 택시들이 줄을 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문제 될 것은 없지
희안마을로 가는 길은 가까우면서도, 먼 것처럼 느껴진다. 분명히 거리로나 시간으로나 가까운 것이 사실이나,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그랬다. 특히 마을 앞의 터널을 지나면은 – 공간 이동을 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희안마을 주변의 온양은 시골이라는 느낌이 확실하게 든다. 시내와 확실히 구별되는 듯한 주거지역들, 그리고 주거지 중에서도 고층 건물이라는 것이 마을 주변에 일절 없고, 족히 25년은 넘은듯한 아파트들과 그 외에는 다 슬레이트 지붕에 벽돌집이 가득하니깐 그럴 것이다. 또 유우명한 신정호라는 호수가 있다. 그 호수는 희안마을 주변의 동네들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기에 충분했다. 호수 외에도 충무공 이순신의 고장이기도 했다. 호수 옆 공원에는 충무공의 동상이 누런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무진은 아니었다.
기사님, 희안마을로 가주세요, 아 주소는 여기입니다. – 희안마을로 가면 알아유? - 예.
공기가 좋았다. 시골에 내리자마자 좋았던 것은 – 마스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 방역당국의 – 말을 듣고 – 그랬으면 마스크를 내리는 것은 불법에 가까웠지만, 시골에 있으면 외지로 갈 일도, 외지인을 만날 일도 거의 없었다. 겨울이니까, 밭일을 하러 나갈 일도 없었고, 역병 때문에 나이 든 동네 분들은 모이기를 꺼려 했다. 그들은 죽음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에, 도시인들에 비해서 민감한 척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그들만큼 민감했다. 택시는 집 앞에 도착했고, 할아버지께서는 방전된 차에 전기를 연결해서 시동을 걸고 계셨고, 할머니는 집안에 계셨다. 1시가 조금 넘어서 도착했으니까, 딱히 도와드릴 일은 없어서, 집에서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그전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저수지를 바라보았다. 주변에 산책 코스만 없었더라면, 저 얼음덩어리는 저수지라고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북극의 얼음덩어리를 끌고 오려던 어떤 얼간이를 떠올리면서.
눈은 적당히라는 것을 몰랐다. 계속 내렸고, 모든 도로와 산과 저수지를 감추었다. 집 안은 화목보일러 덕분에 훈훈했다. 티브이의 소리는 컸고, 방한 커튼 때문에 집 안은 해가 중천에 있음에도 – 어두웠다. 안방의 커다란 창은 창이라기보다는 풍경화가 들어있는 액자에 가까워 보였다. 눈이 나리는 광경을 소리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장작을 보호하는 방수포 위에 눈이 쌓여갔다. 눈은 부지런한 할아버지를 정지시켰다. 농한기의 농부는 장작을 구해와서 패는 것 빼고는 별일이 없었으니까. 할아버지께서는 안방에서 낮잠을 주무셨다. 나는 거실에서 가져온 책을 읽다가,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작불의 그 온기를 닮은 조명, 그 아래에서.
무진기행. 김승옥의 단편소설의 제목이자, 단편소설집의 제목이다. 카뮈의 이방인을 가져올까, 무진기행을 가져올까 고민하던 끝에 무진기행을 가지고 왔다. 책에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들이 가득했다. 무진으로 가는 남자와, 세브란스 병원에서 안해의 시체를 팔아넘긴 돈을 써버리고 모텔에서 자살해버린 남자. 그리고 할머니께서 들려주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자신과 망할 놈의 이 씨 집안의 이야기. 할머니 또한 60,70년대의 할아버지의 “안 해”였으니까. 그러니까 희안마을, 할머니 집에 들어온 시점부터 나는 2020년에 있는 60년대에 들어온 것이나 진배없었다. 사실 억지이다. 난 노트북도 있고, 4G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는 사과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난 단절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말이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그 무진 같은 평택에서의 삶을 청산하겠노라 왔으니까. 부지런함이 미덕이고, 그것이 유일한 성공 비결이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고,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하며 육체를 수련하자. 이만큼 건강한 생활이 어디에 있겠어?
최근의 몇 달 동안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들어왔던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작가는 고통스럽고 전혀 규칙적이지 않은 생활을 해야만 하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그러했으니까. 나는 절대로 프랭클린 같은 작자는 되지 말자고 결심해 왔었다. 프랭클린 같은 사람들은 ‘무진 같은 평택에서의 나’ 같은 인간 부류를 보면 치를 떨면서 저놈을 고치겠노라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그들이 나를 발견하고 경멸하기 전에, 내가 그들을 먼저 경멸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위의 이유를 핑계 삼아 피폐한 생활을 이어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냥 썩어가는 것이 뻔한 나를 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아빠의 권유 이전에 나의 시골형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누가 권하지 않았어도 나는 스스로 탈출을 감행했을 것이다. 그냥 그렇다고 믿고 싶다.
도착하고 나서 동생들이 왔다. 내가 출발할 때는 자느라 나와보지도 않더니, 내가 보낸 새끼 강아지 사진을 보고 나서 오고 싶었나 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때는 할아버지의 차가 시동이 걸리는 상태였으니까, 할아버지와 함께 동생들을 데리러 갔다. 동생들은 저녁을 먹고 그들을 데리러 온 아빠의 차를 타고 가버렸다. 아빠는 순댓국을 사 왔고, 그건 맛이 있었다. 뽀얀 국물과, 순대. 피순대는 항상 맛이 있으니까. 시골의 밤이 찾아왔다. 시골 사람들이 일찍 잠이 들고 일찍 일어난다는 것은 비단 그들의 관성 때문만은 아니다. 도시의 잔 소음과 빛이 일절 없는 방에서 잠이 든다는 것은, 축복이다. 요즘은 그런 곳을 찾기란 꽤 힘들고 돈이 드는 일이니까. 9시에 잠에 들었다. 잠에 들것만 같다는 확신이 있었다. 정신이 멀정한 채로 끈적한 눈을 떠서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는 11시였다. 그다음에는 1시였다. 5시였다. 그리고 7시였다. 특히 5시에서 7시에는 꿈을 꾸었는데,
이상형의 여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그런 꿈이었다. 실제로는 옆에 나전칠기가 있었으므로 딱딱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삼인칭으로 볼 수 없음에 감사함을 느꼈다.
그렇게 첫 날밤이 지나고, 매일 7시에 일어나고 9시에 잠이 들었으며, 책을 읽고, 도끼질을 하거나 할아버지를 도와서 산에서 장작 거리를 찾으러 다녔다. 그러면서 나는 건강을 되찾았고, 삶의 활력을 얻었다. 계획 대로였다. 첫날에는 도끼질을 하다가 아주 몸살이 나 버렸다. 제멋대로 도끼를 휘두르다 보니 안 쑤신 구석이 없었다. 다음날에는 조금 나아젔고, 목요일쯤 되니까는, 도끼로 나무를 폭행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몸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장작은 빠르게 쌓여갔고, 트랙터를 타고 뒷산에 장작더미를 찾으러 가는 일이 많아졌다. 그냥 그렇게 살아갔다. 자꾸만 야릇한 꿈을 꾸는 것만 빼면 불안한 것이 없었다.
어느 날은 장작을 패는데, 비가 내릴 작정인지, 구름이 몰려왔다. 장작을 다 패자마자, 비는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고, 점점 굵어졌다. 눈이나 비가 오면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집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 두 가지 일을 하다가 아주 질려버리면은, 그제야 핸드폰을 만지기 시작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날은 시골에 온 지 꽤나 지난날이라, 가지고 온 책을 거진 다 읽었고, 글도 많이 써놓은 터라, 핸드폰을 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개 놓은 이불 위에 비게를 포개어 놓고, 그 위에 머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사정없이 다리를 떨면서, 핸드폰을 했는데, 나도 모르게 실없이 쪼개면서 보고 있었다. 아 며칠 동안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을 거의 안 한 것 같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핸드폰의 문제라는 것은 – 누구든 중독에 취약해진다는 것에 있었다. 그 중독에 모두 물들기 시작하면, 어디든 무진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해 보였다. 난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8시였다. 9시에 자야 하니까, 할머니와 티브이를 보다가 9시에 잠에 들었다.
내일도 그 다음날도, 일주일 뒤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반복되는 일상에서의 시간은 누군가를 전혀 기다려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난 언젠가 떠나야 한다. 이런 일상이 나에게 무엇을 남겨줄까? 계속 담배는 피우고 싶을 것이고, 하루종일 핸드폰만 하는 날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면 뭐가 달라지는 거지? 어느 시점을 두려워 하면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대부분 그런데, 그렇지 않은 곳도 있더라.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지만, 몸이 너무 무거움이 느껴지고, 만성 비염으로 인한 호흡곤란이 느껴질 때 즈음 잠에서 깨어났다. 할머니는 주무시고 계셨고, 할아버지는 마당에 계셨다. 거위들이 죽는소리를 내고, 수탁들이 울어댔다. 나도 마당으로 나갔다. 할아버지는 마당에 없었다. 안개, 안개가 도처에 깔렸다. 나는 빠르게 저수지가 보이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 집 밭에 서있는 호두나무가 보였는데, 안개가 껴서 흐릿하게 보였다. 잎이 한 개도 남아있지 않고 축 쳐져 있는 호두나무, 이 나무가 호두나무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작년 가을에 그 나무에서 호두를 수확했다’는 나의 기억밖에는 없었지 만은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난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떠났다.
할머니 할아버지, 이제는 여기가 무진입니다. 저는 여기서 탈출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저는 무진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쇼, 여기가 더 이상 무진이 아니게 되는 날에 찾아오겠습니다.
라는 편지를 남기고 급하게 택시를 불렀다.
- 기사님 온양온천 역으로 가주십쇼. –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