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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이 중헌디!

by 아생

김수현 작가의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좋은 학생에는 여러 정의가 있고 잘 사는 것에는 여러 방법이 있으며 우리는 각자의 답을 가질 권리가 있다. 우리는 오답이 아닌 각기 다른 답이다’


그리고 영국의 저널리스트 다니엘 튜더의 평을 덧붙입니다. 한국이 교육, 명예, 외모, 직업적 성취에서 스스로를 불가능한 기준에 획일적으로 맞추도록 너무 큰 압박을 가하는 나라라고.


이와 관련해서 25년 차 비행기조종사인 지인의 말이 잊히지 않는데요. 딸이 묻더랍니다. ‘남자 친구 부모님이 재래시장 후미진 곳에 2평도 안 되는 가게에서 코다리찜 반찬가게를 하는데 괜찮아?’


그래서 되물었답니다.

‘왜? 맛이 없대?’


참으로 뭣이 중한지를 아는 우문현답입니다. 본질은 사물이나 현상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성질이나 본바탕이라고 풀이합니다. 음식장사의 본질은 맛과 신뢰겠지요. 신선한 재료를 깨끗하게 씻어서 건강한 양념으로 맛을 냈고 그러했을거라는 믿음을 고객에게 심어줄 수 있는 시간을 버틴 우직함. 결혼상대자의 본질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는가 일 테고.


이런 본질들을 잊고 저도 모르게 사돈이 될지도 모를 두 집안의 재력, 문화, 학벌등을 속으로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잘 사는 것의 가치를 획일화해서 비교하고 서열을 정해 버린 모양입니다.


비교의 기준점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모르겠으나 날씬하고, 예쁘고, 성격 좋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아야, 남들 앞에서 똑부러지게 말할 줄도 알아야, 공부는 잘해서 명문대를 졸업해야, 일은 남들이 알아주는 대기업에서, 집은 평수가 넓을수록 좋고, 꼬부랑글씨 앰블럼이 크게 박혀있는 차를 좀 타줘야, 잘 사는 거라는 생각을 하는 게지요.


작가는 군대식 문화와 획일화된 통제, 반공 이데올로기가 다른 답을 논하는 것을 불순하게 만들었다. 집단이 강요하는 한 가지 방식과 한 가지 답을 견뎌온 것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했던 우리의 생존방식이고 이렇게 뿌리내린 생각의 방식이 몇 세대를 걸쳐 이어왔다고 말합니다.


‘내’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대를 이어온 가치관은 차치하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떠올려보면 남들이 그러더라 또는 그렇게 보더라를 벗어나 ‘나’를 ‘나’로서 세울 수 있는 식견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하루 10분이라도 인문학 공부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놓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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