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윤 <남겨진 이름들>
고통이나 돌봄에 대한 이야기를 볼 때면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가 떠오른다. 고통 당사자의 곁에 있는 자들의 복잡하고 고단한 위치성에 대한 문제는 늘 어렵다. 고통 자체와 그 고통을 끌어안은 자와 고통을 끌어안은 자를 끌어안은 자.
고통을 두고 두 존재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위계가 생기고 곁을 지키는 자에겐 상대의 고통을 다 알거나 느낄 수 없다는 자책이 생긴다. 또 다른 고통은 그렇게 탄생한다. 곁을 지키는 자의 고통은 상대적으로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곪기 더욱 쉽다.
이러한 고통의 연쇄적인 탄생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연대뿐이다. 고통을 겪는 사람과 곁을 지키는 사람이 서로의 유일한 존재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곁의 곁의 곁을 무한히 만들어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한다.
<남겨진 이름들>은 이 연대의 울타리가 어떻게 서로를 살게 하는지 잘 보여준다.개인적으로 타국의 지명이나 인명을 외우지 못하는 편인데 키르기스스탄이라는 낯선 나라를 배경으로 둔 이 작품 속 인물들의 이름은 선명히 기억난다. 그들은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을 정도의 사명감으로 친구들의 고통을 살핀다. 그 보살핌은 양방향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각자의 고통 역시 타인에 의해 돌보아진다.
날 때부터 혼자였던 나지라의 곁에는 그를 거두어준 라라 아주머니, 친구 올가, 올가의 딸 나타샤 그리고 쿠르만과 타냐가 있다. 사고로 전신 마비가 된 아내 카탸의 유일한 가족인 쿠르만에게는 간병을 돕는 나지라와 타냐가 있다. 쿠르만과 나지라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넘어 내일로 넘어가는 힘겨운 여정의 동반자가 된다. 그들이 카탸를 돌보는 행위에는 분명히 신성함이 있다. 신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서 발생하는 신성함이라니 아이러니하다. 상실에 대한 공포와 끝나지않는 돌봄으로 훼손된 마음과 몸 앞에서 신성하다는 표현은 모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에는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쥐고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염려하는 사람이다.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라는 구절이 나온다. 쿠르만과 나지라가 뿜는 신성함은 이러한 믿음과 책임감에서 나오는 것일 테다. 신이 아닌 서로를 믿는 자들. 그리하여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맞이하는 것.
비극적으로 느껴질 법한 이 이야기를 건너오면서 나는 때때로 책을 덮고 가슴에 손을 얹었던 적은 있지만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책 전반에 깔린 의연함과 모든 인물에게 쥐어진 제 몫의 불행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인물들은 성실한 일꾼들처럼 각자 몫의 불행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겪어내되 함부로 자신도, 남도 탓하지 않는다. 돌이켜 보니 이 책은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떤 태도로 고통과 함께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