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문제는 상실한 삶의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상태가 된 자기 자신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삶을 살다 보면 자신의 소중한 어떤 가치가 상실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한 가치란 부, 연인, 가족, 명예, 건강 등 사람마다 다양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꼭 이런 중요한 가치들의 극적인 가치가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도 사람들, 그러고 나는 종종 이런 질문을 한다.
도대체 삶의 의미가 뭘까?
나는 어째서 살아가야만 하는가?
계속 살아간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 죽는 거랑 늙어 죽는 거랑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의 경우에는 이러한 질문이 명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은 채로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대체로 어느 프로젝트에 몰입하게 되거나 혹은 생활에 활력이 생기게 되면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나의 의문은 아예 의식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삶의 의미에 대한 의식적으로 명확한 해답이 내 삶에서 나온 적은 없다. 다만 이것은 의식적인 것에 국한된 것일 거다. 그 말인즉슨, 내가 어느 프로젝트에 몰입하거나 활력 있게 생활했을 때는 그러한 삶의 의미가 이미 채워져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그 사실을 당시로서는 자각하기 힘들었을 뿐이다. 난 이러한 패턴을 반복적으로 겪어왔고, 스스로가 삶에 의미에 대해 질문하며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현명하지 못한 방식인지 인지하게 되었다.
삶의 의미가 뭔지 몰라 혼란스럽다면 그 원인은 정말 삶의 의미가 뭔지 모르거나 상실해서 그렇다기보다는 단순히 스스로가 권태나 우울에 빠져 있거나 무언가에 대해 집중하고 몰입할 거리가 없어서 그럴 가능성이 높다. 나 역시도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특정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삶의 권태감, 총체적인 허망감, 공허감, 우울감이 항상 프로젝트를 끝낸 뒤에야 모습을 드러내고 나 자신을 미치도록 괴롭힌다. 그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것을 내가 꼭 해야 하는 일 즉, 삶의 의미로 설정했었는데 정작 그 프로젝트가 완성되어 버렸기에 삶의 의미가 상실된 것이다. 혹은 반복적인 학교생활, 특정 조직에서의 생활을 하다 보면 열정적으로 지내다가도 어느 날에는 원인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시에 그러한 우울감과 공허감, 무기력감이 찾아오는데 이런 상태에서도 나는 그런 조직 생활의 의미,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사색하게 된다.
가치라는 것은 무의식이 관할하는 것이다. 당장 내가 장난감 가짜 돈에 진짜 현금과 같은 가치를 부여하겠다고 결심한다 해서 그것이 정말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니고 타인에게 막대한 가짜 돈다발을 받아도 전혀 기쁘지는 않을 것이다. 혹은 양식 요리사가 의식적으로 정치에 가치를 두려고 결심해서 정말 그것을 위해 국회의원이 되려고 열정을 발휘해서 노력하지는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러한 가정 자체가 지나치게 모순적이다. 가치라는 것은 삶을 살아가며 무의식적으로 조정되거나 변경되는 것이다. 나 자신이 의식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하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그때 그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질문을 하는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질문은 대체로 뭔가에 대한 의욕이나 열정을 상실하여 권태에 빠졌거나 내가 가치 있게 여겼던 것이 더 이상 그리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을 때 일어난다. 그런데 스스로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지금 생활하는 반복되는 방식에 대해 무의미감을 느껴 다르게 반복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면 과연 이러한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영원히 사라지게 될까?
삶이라는 것은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통이 없다면 우린 사실상 행동할 이유가 없다. 이미 고통이 없고 모든 것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다루어보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혼란에 대한 고통 역시 삶에 있어 필연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이러한 혼란을 느끼는 것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지만 만약 이러한 일종의 가치상실로 인한 혼란과 권태감에 대해 수십 년의 삶을 살아왔음에도 큰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면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고통 자체를 받아들이는 쪽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의 나는 후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완벽한 해결책을 학습했다고 하더라도 이 문제는 무의식적인 영역이기에 나 자신이 직접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그러한 해결책을 모른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이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사실상 행동할 이유가 없다. 난 권태를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고 싶다. 권태도 물론 고통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고통이란 프로젝트에 대한 고통 즉, 일을 하거나 도전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러한 도전적이거나 특정 강한 권력(조직, 상사, 소비자의 평가)에 의해 마감에 대한 압박을 받으며 업무를 하는 것은 나름 스스로에게 열정을 불어넣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업무 중에 어떤 불의가 생기거나 긴 시간을 요하는 업무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 다시금 그러한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며 그로 인해 혼란스러워하는 시기가 필연적으로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말했듯이 이는 무의식적인 영역이기에 내가 의식적으로 가치를 조정하거나 특정 프로젝트에 몰입하겠다고 결심해도 잘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요점만 먼저 말하도록 하겠다.
신체가 비건강하면 정신도 비건강해지고
정신이 비건강하면 신체도 비건강해진다.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정신건강이든 신체건강이든 소홀하게 관리해서는 안된다. 어느 한쪽에서 문제가 생기게 되면 총체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내가 위에서 말했던 삶의 의미에 대한 혼란도 정신적인 비건강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생각이 들면 몸도 권태로워지고 무기력해지지 않는가?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이 신체나 정신, 둘 중에 무엇이 근원이었는지 여기서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다. 내가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부분은 나 자신이 지금 건강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단순히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이러한 건강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신체를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는 만약 삶의 의미에 대한 혼란, 권태에 빠졌다면 운동을 하는 것을 적극 권장한다. 사실 권장하거나 추천하기에도 무색하게 모든 자기계발서나 성공한 사람들 중에 운동을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대부분이 운동을 적극 권장하며 그중에서 유산소 운동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이 유산소 운동, 특히 러닝은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기 위해 매일 필연적으로 해야 할 일'로 여기고 있는 수준이다.
내가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아주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양해를 바란다. 난 이런 삶의 의미에 대해 혼란을 겪고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면 항상 극적인 방향, 극적인 변화를 통해 삶을 조정하려고 노력하는 성향이 있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런 방식은 자주 이탈과 탈선의 결과를 낳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았다. 작가가 되어 활동한 사람이 작가 생활에 불만족을 느껴 어떻게든 노력해서 요리사로 직업을 변경했다고 하더라도 불만족을 느끼지 않을까? 그 불만족이란 그 직업의 삶을 살면서 느껴봄직한 일종의 고뇌와 같은 것일 텐데 말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그 고통 중에는 현명한 판단과 생각의 방식으로 상쇄시킬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직접 음미하며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기다려야만 사라지는 고통이 있는가 하면 항상 끌어안고 삶의 끝자락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 고통도 존재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 혹은 삶에 대한 혼란도 그러한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 고통과 씨름하거나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 고통 자체를 음미하며 받아들이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고통 자체가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하는, 혹은 열정적으로,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도록 노력하게 하는 원동력의 하나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기에 만약 삶에 대해 권태감이나 무가치감, 무기력감이 든다면 더 이상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보다는 그 고통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하자. 하지만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딱히 즐겁지도 않을 것이고 열정적으로 임하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 그러한 일을 하는 것 그 자체에 뜻을 두라고 말하고 싶다. 즐겁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침대에 드러누워 두꺼운 이불을 푹 덮어쓰고 이유모를 눈물이나 흘리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