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혼돈 그 자체다.

그 누구도 자신이 탄생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by 카를

우리는 어떤 특수한 사건을 겪거나 남들에게서는 관찰할 수 없는 드문 현상이나 환경이 자신에게 들이닥치게 된다면 많은 불만과 불합리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 나만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건지, 어째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이 찾아오는 것인지 고심하게 된다. 지금의 나도 적잖이 그런 생각을 끌어안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이것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쩌면 아무리 희귀하고 특수한 일이 벌어졌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이상 그것은 말 그대로 현실적인 일이며 일반적인 일로 치부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복권 1등의 확률이 아무리 희박하다고 해도 꾸준히 당첨자는 나오고 있고, 기술의 발달로 삶의 질이 향상돼도 주변의 정신 나간 사람이나 우둔한 사람은 늘 존재하며 뉴스에서는 여러 재난이 끊임없이 보도된다. 뉴스나 경제 현황 등을 보고 세상이 말세라느니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늘어놓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500년 전의 사람도 신문이나 전보를 보고 똑같이 말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고는 더 이상 그러한 바보 같은 푸념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자신이 부당한 처지에 있다거나 부조리한 대우를 당하더라도 이것은 그다지 특수하거나 이례적인 것은 딱히 아니라는 것이다. 그 모든 재앙, 재난, 부조리, 사건, 사태 등이 오래전 과거부터 지속되어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크게 예민하게 반응할 것도 없는 일반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 그런 판단을 했고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 못 할 일이라며 분개할 필요는 딱히 없어 보인다. 다만 그것이 자신과 주변의 삶의 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자신또한 그런 환경을 개선하고자 한다면 그때는 합리적으로 개혁을 위해 나서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특히 내가) 느끼고 있는 이른바 실존적인 고통에 관해서도 이는 같을까? 애초에 이런 문제는 수 세기 전부터 있어왔으며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자신이 왜 사는지, 혹은 왜 살아가야만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여러 사람들, 과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분히 느끼고도 남았을 문제다. 즉 이는 지극히 일반적이며 현실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질문에 명확한 답이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둬야만 할 것이다. 진정한 사실은 자신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결국 정답이자 진리가 된다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과 사고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종교라는 것은 믿음이라는 큰 집합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하지만 난 삶이 혼돈이라는 것이 믿음에 의거한 것이 아닌 절대적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그 누구도 자신이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삶이 혼돈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크게 한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살고 있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당신은 언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나? 당신의 기억은 몇 살 때부터 시작되는가? 당신이 생각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언제인가? 이러한 질문을 해도 사실 명확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지라는 것은 번뜩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점진적으로 발달하기 때문이다. 인지능력이 향상된다는 것은 의식이 깨어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내가 말하는 의식이 깨어난다는 말은 쉽게 말해 자신이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흔히 말하는 사춘기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실존의 문제로 인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은 의식이 깨어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뭐가 어떻게 됐든 나 스스로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세상이라는 곳에서 삶이라는 것을 살고 있었다'라는 사실은 다름이 없다. 이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어린아이가 사람이 북적이는 번화가 한가운데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어린아이는 당연하게 어리둥절할 것이며 당연하게 혼란스러울 것이다. 이것이 실존의 문제에 직면한 사람이 느끼는 감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가 번화가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뭐가 있을까? 그 아이는 주변 환경에, 주변 사람들에 의해 휘둘릴 뿐이다. 한낱 어린아이일 뿐인 그는 주변의 모든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어버린다. 만약 그 아이가 성숙하는 시기가 있다면 그 시기는 거짓말을 배운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르게 가식, 아첨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직장생활을 하는 성인들은 이를 아주 잘 이용하며 활용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 모든 것들이 그다지 특수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모든 고통도 혼란도 그리 큰 가치를 둘만하지도 않고 반대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일에 내가 그리 크게 반응하지 않게 된 이유, 즉 즐거운 일에도 격렬히 신나 하지 않고 우울하고 불행한 일에도 그리 침울해지지 않게 된 것이 이런 생각들로 인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누구이며 왜 존재하는지를 의문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생각이다. 이건 어쩌면 의식이라는 것이 삶 도중에 깨어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결국 답은 나오지 않고 문제가 딱히 해결되지도 않는다.


솔직히 난 이 글을 쓰며 딱히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아서 적잖은 무가치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당연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삶의 진리나 정답이라는 것은 개개인이 특정한 뭔가를 믿고 그것을 열렬히 신봉하는 행위를 일컫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삶의 의미를 알 수 없어 방황한다면 아마 두 가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자신이 신봉하던 믿음이 특정 사건으로 무너져버리거나 혹은 그 어떤 것에도 특별한 가치를 두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광신도마냥 신봉하거나 사소한 뭔가에 큰 가치를 두게 되면 그런 불안, 혼란, 공허의 고통이 해결될까? 이는 신이 아닌 다른 뭔가를 믿는 종교나 딱히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종교가 없다곤 해도 사람들은 자기만의 뭔가를 신봉하며 사는 것은 사실이다. 요즘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돈을 신봉하며, 나의 경우에는 뭔가 작품을 내놓거나 그것을 위해 생산적으로 사는 것에 가치를 느끼고 있고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 믿고 있다.


사실 그뿐인 것 같다. 다만 그 믿음은 주도적이어야 하고 자신에게 있어 매우 합리적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주변 사람에게 휘둘리는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다.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는 거짓과 반항이 어찌 보면 필수적이다. 일반적인 것, 모두가 남들을 보며 따라 하는 것을 나 자신에게 강요하게 되면 난 그걸 뿌리치고 반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난 남들에 비해 따라 하는 것을 원치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그림을 전공하던 사람이었고, 그림을 그리며 그것으로 영상을 만들어 돈도 벌긴 했지만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을 공부하고 있고 작곡을 위한 화성학을 공부하고 있다. 내가 만들 영상의 음악을 내가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취지에서이다. 난 이러한 생각에서 시작한 음악공부가 싫지는 않다. 이론은 꽤 어렵지만 나름 흥미롭게 공부하고 있다. 누구는 이것을 두고 시간낭비라거나 그림에나 집중하라며 질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난 이런 공부들로 딱히 자격증을 따거나 돈벌이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타인이 보기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다만 내가 확실히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어떤 분야에 흥미를 느낀다는 것은 말 그대로 그 분야 자체, 음악을 예로 들면 내가 즐겨 듣는 음악이 도대체 어떻게 구성된 것인지, 신나는 음악은 어떻게 신나고, 내가 그걸 직접 만들게 되면 얼마나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발휘할지 그런 것들에 흥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분야 자체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그 분야에서 손을 쉽게 떼지 않도록 잡아주고 인정에 대한 기대는 그 분야에 대한 공부의 열정을 가지도록 해준다.


물론 잘 될리는 없다. 나의 기준치는 하늘을 찌르고, 내가 음악을 공부할 시간은 올해에만 한하기로 하고 그 뒤로는 다시 그림 공부를 하기로 계획했기 때문이다. 요지는 내가 이미 스스로가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할 거라는 점을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나름의 초연한 생각과 자세는 자주 정신이 멍해지거나 혼란스러워지기도 하지만 나를 꾸준히 행동하게 만들어준다. 나에게 있어 이보다 좋은 방법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게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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