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염없이 그를 바라보다 점점 시간이 지나 멀어졌지요. 멀어진 그 사람은 별이 되어 콕, 박혀버렸습니다. 영원히 잡힐 일 없을 별을 보는 것은 어쩌면, 나를 미워해야 가능했고 또 자주 나를 열렬히 사랑해야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반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휘몰아치던 모든 마음은 고요해졌고 우뚝 솟아있던 당신을 사랑했던 마음은 부서져 바다에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라지지는 못할 마음이 자주 부유하고 출몰하곤 했지요.
나는 그가 아주 날카로운 장검 같은 삶을 살아갈 것 같아 마음이 쓰였어요. 그는 꼿꼿하고 고고한. 서슬 푸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 마음이 아려서 나는 머리가 하얗게 세는 기분이 발끝부터 들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꼭 쥔 주먹이 손바닥까지 붉게 만들었던 수많은 밤을 기억해요. 그동안 당신. 하고 부르는 소리 없는 외침이 안으로 쌓이다 그 축척이 어쩌면 심장을 멎게 만들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을 때쯤 홀연 자유로워지곤 했던 일들이 있었지요.
기억을 되살려 주는 프루스트의 마들렌이라도 먹은 걸까 그는. 하고 생각했습니다. 억새를 보러 갔다 식사를 대접할까 생각 중입니다. 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 말이에요. 그 문자를 받고 읽고 또 읽다가 마음에 넣어두고 읽고 길을 걸으며 읽고 누워서 읽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읽다가 꼬박 며칠을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겉옷을 꺼내 입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쌀쌀한 시월의 중반,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느라 하얗게 하늘을 밝히지 못한 해가 뜬 때에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지요.
결국 나는 그날 겨우 선잠만 자다 그를 만났어요. 여전히 무표정한 그를 보니 여전해서 안심이 되었습니다. 보조석에 꽂혀 있는 시원한 탄산수를 보고 그의 얼굴을 흘끔흘끔 보았습니다. 나는 탄산수를 좋아해요. 응. 정말로 좋아해요. 하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막고, 백만 가지 질문을 참고 밤새워 다짐했던 것들을 다시 다짐하면서 숙숙하게 뭉친 분위기를 가지고 우리는 남해로 향했습니다.
당신. 하고 얼마나 부르고 싶었는지 당신은 알까요.
애써 웃고 밝자고. 그것만이 보내지 못한 편지를 대신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지요. 그렇게 이상한 여행을 출발하면서 내가 말했어요.
우리 오늘은 날이 적당하니까요. 머리는 뒤로하고 마음 가는 대로 즐겁게 시간을 보내요.
그는 또 언제나 그랬듯 나의 백 마디 마음에도 끄덕하고 말 듯, 또 그렇게 끄덕이고 네. 하고 대답합니다. 나는요, 당신의 문자를 받았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나직한 그의 끄덕임을 보면 다시 꼬박 앓겠구나 나는. 다시 당신은 응집해서 내 마음속에 우뚝 솟겠구나. 그래도 그가 없는 시간 동안 늘 다짐했던 것만 생각하자고. 살면서 언제나 중요한 것은 진심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또 어떤 사랑이 어떻게 오더라도 겁먹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내자고. 그것만이 살면서 애써 지켜내야 하는 유일한 마음이라고요.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냔 그의 질문에 나는 보리암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어요. 인터넷으로 본 보리암은 남해의 절경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절이었고 산새에 자리 잡고 있었고 또 우린 산을 좋아하니까요. 그가 산을 좋아하니까요. 휴일의 아침이라 다른 곳들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마지막에 보리암에 가기로 했어요. 우리는 남해로 향했고 나는 쉬지 않고 떠들었어요. 몰아붙이지 말자고. 기다리자고 했던 다짐이 가끔 무너져서 잘 지냈냐고 안부를 묻곤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와 즐거웠습니다.
그를 만났을 때 종종 갔던 여행처럼 여행했어요. 목적지는 언제나 큰 것 한두 개뿐 늘 즉흥적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관광지를 들르거나 공원에 내려서 걷거나 하는 방법으로, 그를 만나던 그때처럼 하루 종일 남해를 돌아다녔습니다. 우리는 바다에 갔다가 산으로 갔다가 거대한 돌들을 보고 우뚝 솟은 편백숲을 지나고 내리자마자 비릿한 냄새가 나는 삼천포로 가서 짭조름한 생선구이를 나눠 먹고 바삭하게 갓 튀긴 꽈배기를 차안에서 호호 불면서 또 먹었지요. 아침에 굳어 있던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부드러워지곤 했습니다. 칠 개월 만에 본 그는 더 이상 날을 세우고 있지 않았습니다.
부산으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으로 우리는 보리암으로 향했습니다. 좁은 길을 한참 올라갔고 고도가 높아지자 귀가 먹먹해졌습니다. 하루 종일 걸었고 잠도 못 잤지만 나는 여전히 팔딱거렸어요. 그냥 그랬어야 했고 또 그러고 싶었거든요. 보리암에서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 주차하고 우리는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차에서 내릴 때 그가 지갑에서 삼천 원을 꺼냈고 나에게 주면서 ‘보시, 해야지요.’하고 건넸습니다. 불자는 아니지만 절에 가면 기분 내곤 했던 나를 기억해 주는 그가 고마웠습니다.
시월이었지만 조금 가파른 산을 오르자니 등줄기에서 땀이 조금 흘렀고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있으니까 괜찮았어요. 하루 종일 걸었지만, 또 괜찮았어요. 즐거웠고 또 당신을 만나면 괜찮으려고 계속 운동했으니까. 몸도 마음도 튼튼해져야지 하고 계속 달렸으니까 정말 괜찮았어요. 얼마 오르지 않아 수려한 해안 절경을 끼고 있는 보리암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름이 가득하고 일몰이 다가오고 있어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데 당신은 젖은 머리를 바람에 말리고 있었지요. 일몰을 보고 싶었는데요. 야속하게 구름이 많아서 일몰을 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올 초, 그와 일출을 보러 갔던 일이 생각났어요. 살면서 처음으로 일출을 보러 캄캄한 새벽에 그와 산을 오르던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도 구름 때문에 해를 보지 못했지요. 하고 말했는데, 그는 대답 대신 일몰 못 보겠네요. 하고 말했습니다. 올 초에 나는 일출을 보러가서 당신과 오래도록 사랑할 수 있기를 소원하려 했지요.
해가 지니까 하늘이 빠르게 어두워졌어요. 하루 종일 웃으면서 그와 다니던 일들이 갑자기 꿈인가 싶어집니다. 왈칵 마음이 쏟아져서 나는 당황합니다. 당황하는 끝에 슬픔이 파도처럼 덮쳐오는 것이 느껴져 바닥을 바라보면서 어서 내려가자고 그를 재촉합니다. 나는 울음을 참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다리만 허둥대면서 내려갑니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웃기만 하려고 했는데. 해가 지는 것을 보니까 오늘이 다 갔다고. 그러니까 하루 동안의 소풍이 끝났다고. 그러니까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참을 수 없어집니다. 결국 죄송하다고.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고 훌쩍이며 사과하는 일이 생겨버립니다. 그가 그날 처음으로 먼저 내 손을 잡습니다. 손이 따뜻합니다.
언제나 그랬지요. 완강한 사람인데, 자기가 맞다고 생각한 것을 번복하는 일이 없는 사람인데. 늘 나에게는 물렀지요. 나만 만나면 휩쓸리고 나만 보면 자꾸 번복하지요, 그는. 그래서 나는 그가 잘 휩쓸릴 수 있도록, 휩쓸리는 것을 눈치챈다는 것을 모르게. 그래서 그가 종종 분위기에 휩쓸리고 사랑과 낭만에 잘 휩쓸릴 수 있도록 언제나 조심히 교묘했어요. 나는 그가 그렇게 틀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어요. 안 해보던 일 해요. 우리. 하고 속으로 말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요. 하고 밖으로 말하고 그렇게 했어요. 그래서 그가 또 나에게 휩쓸려요. 그리고 그건 내가 진심이니까 또 알면서 휩쓸려 주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아요.
꿈같은 하루를 다 보냈어요. 안녕. 하고 잘 지내요. 하고 인사하다가, 그러지 말자고 말해요. 그러지 말아서 이런 즐거운 하루가 왔으니까, 또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 모르니까요. 머리 말고 마음만 앞서서 갑자기 ‘산에 갈래요, 우리.’하고 묻고 싶어지고 마는 날이 올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정해두지 말아요. 하고 말해요. 그러니까 또 봐요. 하고요. 그가 나를 안아주면서 네. 하고 작게 대답해 줘요.
집으로 돌아오니 칠 개월이 와르르 그렇게 다 무너진 것 같기도 하네요. 그렇지만 나 또 잘살고 있어야지, 하고 다짐해요. 그도 잘살고 있기를 바라요. 다시 주먹을 꼭 쥐고 긴 밤을 자야 할 것 같지만 괜찮아요. 꿈같은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알았거든요. 그 사람이 내가 준 사랑으로 조금 삶을 버텨나갈 힘이 생겼겠구나 하고요. 그래서 언젠가 다시 또 보는 날까지 조금은 안심할 수 있어요. 나도 혼자 잘 버텨낸 시간이 있어서 나를 안심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또 봐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