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첫날을 기억해요. 연락처를 알고 있었던 나는 순전히 치킨을 먹고 싶고 치킨은 한 마리를 다 먹기는 어려우니 같이 먹는 것이 치킨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 경제적인 효율이라며 다 알법한 핑계로 그를 꼬드겼어요. 약간 이른 겨울, 조금 쌀쌀한 날씨지만 우리는 바삭한 후라이드 치킨 한 마리와 생맥주 두 잔을 시켰어요. 저는요, 사랑 앞에서의 저를 너무 잘 알아요. 사랑에 빠지는 대상이 앉는 모습만 봐도 나의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을요. 그가 자리에 앉으며 셔츠 깃을 조금 만질 때 알았죠. 나는 오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치킨이 먹어지지 않겠다는 것을요. 난 그날 치킨을 남겼답니다.
맥주를 마시며 그가 말했어요. 제 인생에 술, 담배, 문신이 있는 여자는 만나지 않아요. 라고요.
그런데 어쩌죠. 저는 부산에 혼자 살고 술을 마시죠. 마시는 술에 취해서 주절주절 수다 떠는 내 모습도 퍽 좋아하는 편이죠. 문신도 있어요.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스페인어로 된 문신 하나, 꽃진 자리에 있는 무궁화 하나, 엄마와 함께 스무 살이 된 기념으로 새긴 별 하나. 제 이름은 별이 들어가거든요. 엄마는 행운을 바라서 네잎클로버를, 저는 늘 별처럼 빛나라고 별을 새겼던 기억이 나요.
어릴 적 치기로 담배도 펴봤어요. 뭐랄까, 인생이 고달픈데 멋진 언니들은 다 담배를 피우더라고요. 그래서 멋지게 담배를 피우는 언니에게 배워서 피워봤는데 나는 입안에 남는 담배 맛이 싫어서 자꾸 침을 뱉고 싶고 그러면 조금 낙타 같아지고 그러면 나는 언니처럼 안 멋있게 피는 것 같아서 그만뒀어요.
그날 전 서류전형 탈락이라고 그가 말했어요.
그 사람의 탈락이라는 말에 머릿속이 반숙 후라이를 만들려다 실패한 완숙 후라이 같아졌어요. 촉촉해야 호록하고 잘 먹을 수 있고 잘 먹어야지 그 사람과 잘 싸울 것 같았는데 퍽퍽해진 머릿속은 낙담만 가득 먹게 했어요. 하지만 난 콧대 높은 여자이고 싶었어요. 뭐랄까 그때는 세상의 기준으로 이쪽으로 보나 저쪽으로 보나 내가 이기는 장사였거든요. 겉으로는 그래서 어쩌라고요 였는데요 마음은 어째주세요 였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이랑 거래를 시작하고는 지는 장사만 했어요.
그는 세상을 자신이 만들어 둔 기준으로 살았어요. 그를 만나고 두 달쯤 뒤에 쓴 일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답니다.
“전 제가 무너지면 아무것도 없어요.”
라고 말하는 그는 어떤 삶을 살았던 걸까 하고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는 안정적인 심리상태,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 내기까지 어떤 것들을 계속해서 포기해 왔을까. 그것이 쉬운 길이 아니었을 텐데, 당신은 살면서 어떤 것들에게서 상처받아 왔을까. 외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수많은 날과 생각과 시간과. 지금 어렵게 얻어낸 안정. 그 안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는 어떤 것이든 버릴 수 있겠지.
그에게 연애도 여자도 자신의 관념적 개념 아래 정의되어 있는 어떤 것에 불과한 듯 보였지요. 그는 삶을 안정적으로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것들로 모든것을 개념화했죠. 지독한 것 같죠? 아니요. 저는 그래서 그를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주변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그 안에서만 산다면 내가 그의 손을 잡고 날아서 달나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거든요. 그는 헤어질 때까지도 날 잘 몰랐어요. 나는요,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 마냥 말랑하지만은 않거든요. 그 사람이 살아온 결핍보다 제 결핍은 아주 커다랗죠. 나는 낭만의 또 다른 이름이 생존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자신의 낭만을 아주 짙은 색으로 만들면 어떤 고난이 닥쳐도 덮어버릴 수가 있죠. 그 사람은 생존을 생존 도구로만 살려고 해서 자꾸 실패하겠지만 난 낭만을 가지고 있어서 실패 속에서도 웃기도 하거든요. 그는 정말 몰랐겠지만 더 현실적이고 단단한 사람은 그보다 나예요.
저도 사랑으로 생존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 마음을 먹었던 것 같아요. 실은요, 나중에 그와 헤어지고 나에게 사랑을 폭탄처럼 퍼부었던 두 명의 애인을 저주했어요. 너희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절절 우는 사랑을 했다고요. 그 애인들과 이별하고 결심했거든요. 다음번엔, 나도 이렇게 받은 사랑으로 아무것도 재고 따지지 않고 사랑만 주겠노라고. 지나간 연인에게 받은 사랑으로 내가 살아남은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사랑으로 구원해야겠다고. 그래서 지나간 엄한 애인들만 소환해 눈을 흘기면서 울기도 했던 것 같아요.
구원이라니요, 지가 예수에요 부처에요 뭐에요. 저는 신 행세 하다가 신만 찾게 됐지요. 부디, 그의 삶에도 낭만과 사랑이 가득하기를요. 하고요. 하지만 홍수 속 터져버린 댐처럼 막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 사람을 사랑한 나는 신이 맞았던 것도 같아요. 서류전형 탈락인데 특별전형으로 통과되었거든요. 소원을 셀프로 이루어 내었으니 임시 신이었을지도 모르죠. 기적같이 현실에서만 살던 그가 나랑 달나라도 가끔 가주고 또 그 사람 입에서 평생 나오지 않을 것 같던 단어도 나왔으니까요. 사랑과 낭만 말이에요.
아마 그는 다시 평생 이기지 못하는 싸움을 하고 살 것 같아요. 왜냐하면 행복을 미뤄두고 나아가는 전쟁의 결말은 늘 허망한 승리일 뿐이니까요.
하지만 나를 만났으니 가끔 자신을 돌아보면서 살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추억은 힘이 없다고 하죠. 하지만 음악과 향기와 분위기는 가슴에 말뚝을 박지요. 저는 술과 문신이 있는, 부산에 살고 키가 작은, 낭만을 가내수공업 하는 여자고 당신에게 모든 기술을 몰래 전수해 주고 왔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