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Vios ke politia tu Aleksi Zorb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by 동동이

10년도 더 전에 그리스인 조르바 책을 구입했다. 아마, 추천책 목록에 늘 있던 책이었기 때문인거 같다. 처음은 40페이지, 몇 년 후 두 번째 시도에서는 100페이지 정도 몇 번 읽기를 도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독서모임에서 책 선정이 '내'차례가 되어, 이 책을 선정하고 완독 하게 되었다.


처음 조르바에 대한 내 느낌은 여미새였다. 아무래도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뭐 거의 동물 수준으로 여자를 좋아했다. 의문은 ‘사람들은 왜 이런 책을 추천 도서로 이야기하는 가?’이었다.


인내심 있게 200페이지를 넘게 읽은 뒤, 조금씩 느낌이 달라졌다. 조르바는 여미새가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구나’. 그 사람은 많은 일을 겪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날 봐요, 나보다 복 많은 사람이 또 있겠소? 밭이 있겠다, 포토밭, 올리브 과수원에다, 이층 집이 있겠다, 돈도 있겠다, 마을 장로겠다, 착하고 정숙한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만 쑥쑥 잘 낳았겠다... 뭘 더 바라겠소? 나는 뿌리를 잘 내렸다오. 그러나 이놈의 인생을 또 한 번 살아야 한다면 파블리처럼 목에다 돌을 꼭 매달고 물에 빠져 죽고 말겠소. 인생살이는 힘든 것이오. 암, 힘들고 말고..


책 속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 많다.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생각하게 되는 글들이 있다. 위 글은 어쩌면 내가 꿈꾸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브랜드 아파트 자가, 중형 이상 SUV차, 결혼, 자식, 사회적 지위 등 모든 것을 이루었을 때 과연 그게 인생을 잘 살았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저 노인은 다시금 인생을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한다. 과연 또다시 한번 더 같은 삶을 산다면 그건 행복일까?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사이다. 자신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 세바시 어느 강연자가 나와서 이 책을 소개하면서 저 대사를 이야기했다.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린 내가 잘되길 원해서 노력한다. 나를 구하기 위해, 공부하고, 노력하고, 애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남을 구하는 일은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 강연자의 말처럼, 잘되는 가게들의 비밀은 손님에게 푸짐하게 주는 것이다. 양이든, 서비스든, 마음이든. 자신을 위해 이윤을 남기기 위해, 시간을 아끼기 위해 노력하는 가게는 잘 되기 힘들다. 사람들은 그런 집들을 바로 안다. 어찌 보면, 인생의 명언 같은 말이다.


<오냐, 나는 죽지 않을 것처럼 산단다>. 내가 대꾸했죠. <저는 금방 죽을 것처럼 사는데요.> 자 누가 맞을까요?, 두목?


이 책은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인가 묻는다. 조르바처럼 살 것인지, 책 속 화자인 '나'처럼 살 것인지. 누가 맞을까? 어떤 삶의 방식이 정답일까? 정답을 가르쳐주진 않지만 각자가 살아가야 할 삶이다.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스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그놈이 유일하게 내가 아는 놈이고, 유일하게 내 수중에 있는 놈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게요.

'나답게'라는 키워드가 자주 보인다. 예전과 다르게 Find Myself 나를 찾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기존 세대가 '내'가 아닌 '가족' 혹은 '회사'를 가치로 두고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나답게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조르바는 자신의 내면에 이야기를 듣는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렇게 살아간다. 결국 '나'를 믿는 것이다.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어렴풋하게나마 그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의 낡은 세계는 구체적이고 견고하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실제 하는 세계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을 빚는 재료인 빛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오직 행복한 순간이 과거로 지나가고 그것을 되돌아볼 때에만 우리는 갑자기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깨닫는다. 그러나 이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번데기에서 나오는 과정은 참을성 있게 이루어져야 했고, 날개를 펴는 과정은 햇빛을 받으며 서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온통 구겨진 채 집을 나서게 강요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고 말았다.


그리스인 조르바 덕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하나 더 생겼다. 살아간다는 것은 낯선 것과의 조우가 아닐까? 조르바를 읽지 않은 분이 있다면 추천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