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창호지 문으로 햇볕이 들어와 방은 이미 훤하게 밝았다.
명자,명희는 이불 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다. 갑창까지 꼭꼭 닫아두었으니 해가 떠도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요놈들, 늦잠이네"
병은은 방문을 열고 살금 살금 들어가서 이불을 살짝 들췄다. 아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지만 아이들은 세상 모르고 자고 있다.
"이래도 안 일어날래?"
양팔꿈치로 두 녀석을 쿡 쿡 찔러 본다.
"이만하면 잠이 깰만도 한데... 어디?"
간지럽히기다.
귀찮은 듯 돌아누울 뿐 잠에서 깨려고 하지 않는다.
"일어나자. 아침이다. 아부지랑 산에 가야지"
명자가 이불을 끌어다 머러꼭지까지 덮었다.
병은은 이불밑에 대고 소리쳤다.
"일어나. 일어나라구~~우~~ 명자야~ 아부지랑 산에 가자~~아"
이불 밑에서 명자가 꼼틀꼼틀하는 모양이 보였지만 나올 생각이 없나보다.
명희는 똑바로 누워서 눈을 꼭 감고 있다.
잠에서 깼는데 아닌 척을 하며 누워있는 것이리라.
"먼저 일어나는 사람은 사이다 사주려고 했는데, 아이, 둘 다 안 일어나니 참."
"일어났어요!"
명희가 오뚜기처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불 밑에서 새우처럼 잔뜩 꼬부라져 있는 명자는 사이다보다 잠이 더 좋은가 보다.
"자, 그럼 우리 산에 갔다가 사이다 먹고 오자"
"네, 아부지"
명희는 구겨지고 엉킨 머리카락을 손가락 빗질을 하며 옷을 입었다.
"얼른 세수해야지. 세수 금방 할게요~"
"후후. 그래, 언니는 안 일어나려나보다. 우리 둘이 다녀오자"
"아휴, 일요일인데..."
명자는 몸을 엎드려 웅크렸다. 엉덩이부터 들어보려 하지만 이불 밑에서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 개운하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더 자고 싶은데.."
"명자야, 얼른 나와. 아버지랑 산에 갔다가 사이다랑 찐빵 먹고 오자"
늦잠도 달지만 아버지가 사주는 중국식 찐빵맛이 떠올라 군침이 돌았다.
"일어났어요"
일요일이면 병은은 아이들과 인왕산에 올라갔다. 정상까지는 못 올라가도 멀리 한강이 보이는 너른 바위와 굴처럼 움푹 들어간 바위그늘까지 갔다가 약수터에 들러 내려왔다.
이제 명자네는 여섯 식구가 된다. 명희도 어엿한 국민학생이 되었고, 여름에 태어난 첫 아들인 완무와 영숙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넷째까지.
한여름 완무가 태어나던 날. 명자와 명희는 집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며 어른들이 쥐어준 고구마를 대문간에 앉아서 먹었다. 한여름에 왠 고구마냐. 여름에 먹는 고구마가 신기하고 맛있었지만,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게 서운하고 속상했다.
팔뚝만한 고구마를 다 먹고 났는데 남자 동생이 태어났다고 했다.
"칫, 아들 동생 나면 귀한 고구마도 생기는 구나"
"넌, 뭘 그런거 갖고 삐지니?"
"내가 뭘?"
대거리를 하는 명희에게 대꾸하지 않고 명자는 고구마를 먹었다.
'남자 동생 생긴 덕에 고구마도 먹으니 얼마나 좋아. 저 샘쟁이는 저만 이쁘다해야 하나보네'
병은은 운좋게 총알 한 번 맞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육군 중위인 병익이 형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온 적도 있지만 제주도까지 가기도 했고 전투기에서 떨어지는 포격으로 인해 움푹 움푹 파인 웅덩이를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전쟁 전에는 화신백화점 직원으로 일했지만 전쟁이 끝나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아현동 기와집을 팔고 말았다. 시골의 큰 형수는 서울에 기와집을 사주었더니 그걸 팔아먹었다며 본가에 갈 때마다 싫은 소리를 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재산인데도 큰 형수는 형제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아까워하고 못마땅해했다. 병은은 본가에 갈 때마다 형수가 미워서 일찍 떠나 어머니가 그리워서 뒷마당에 심어진 매화나무를 붙잡고 울었다.
전쟁이 끝난지 4년이 지났다. 이제는 어엿한 전매청 직원으로 여섯식구 쯤은 거뜬하게 건사할 수 있게 되었다. 막내로 자랐지만 뼈대있는 가문이라는 자부심이 늘 병은의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칠 때는 무서운 아버지지만 휴일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서는 자상한 아버지다.
"아이구 저거 봐라. 돼지가 떠내려 간다"
"어? 항아리도 가네"
"어, 어, 저건 뭐야? 절구공이도 가요"
"이야~ 비가 얼마나 많이 왔으면 집안 살림이 다 떠내려 가냐?"
장맛비가 멈추면 영천에서 한강대교까지 굳이 물구경을 하러가는 병은을 영숙은 유난스럽다고 했지만, 처마에서 똑똑 떨어져서 마당에 포문을 일으키는 빗방울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명희가 제 아버지의 감수섬을 닮았나보다고 생각했다
봄에는 선분홍색 복사꽃과 수양벚나무가 물을 들인 인왕산이 가을빛을 가득 담기 시작했다. 약수터 아래 너른바위에 오르면 서울이 온통 내려다 보인다. 멀리 한강물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흐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가 빠른 속도로 재건되고 있었다.
전쟁터에 끌려다닐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을 찾아내던 병인이 형은 지금 감옥에 있다. 일제때 나쁜짓이란 나쁜 짓은 골라가며 하던 악질 김창룡이 죽던 밤 병익이 형의 집차가 동원됐다고 했다. 형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차만 빌려줬다고 하지만, 감옥살이는 피할 수 없었다.
병인이 형은 짧은 형기를 선고받아서 수감중이지만 암살을 계획한 허태연 장군은 결국 사형이 집행될 것이라고 했다.
병은은 이제 30대 초반이지만 수백년은 산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시골 양반집에서 부족할 것 없이 자랐지만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그리움을 못 이겨서 집을 떠나 서울로 유학을 왔다. 일본인 밑에서 공부하면서도 부당한 세상에 고개숙이고 싶지 않았다. 배워야 싸울 힘도 생긴다는 아버지 말씀에 열심히 공부하고 장성하여 결혼도 했다. 해방이 되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이제는 살만한 세상이 되었나 했는데 전쟁이 나고 사지로 끌려 다녔다.
전쟁이 끝났지만 세상은 아직도 어지럽다. 북으로 끌려간 사촌들, 납북인지 월북인지도 알지 못하고 매맞고 감시받는 그 가족들, 직장을 잃고 목숨을 잃고 몸을 잃고 살아가는 친구들.
멀리 반짝이는 한강물만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흐르는 모양이다.
그 빛을 쫓아 슬픔도 원망도 흘러가 버리기를 바라고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