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어령 선생의 강의를 듣다가 말씀 중에 인용하신 '구구소한도'에 관심이 가서 찾아보게 되었다.
구구소한도란 중국에서 들어와 주로 선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풍습으로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그리는 매화그림을 말한다. 동지부터 9일마다 점차 추위가 누그러져 9번째, 즉 81일 되는 날에는 추위가 풀린다는 의미로 종이 위에 매화 아홉 가지를 그려놓고 한 가지에 아홉 송이씩 그려 넣어 흰매화 꽃송이가 81개( 9x9=81 )가 되도록 그림을 그린다. 이 그림을 벽에 붙여놓고 매일 한 송이씩 흰매화 꽃송이를 붉게 칠해서 홍매화로 만들어 나간다. 동지 다음날부터 칠을 시작해서 마지막 한 잎을 칠하는 날이면 경첩과 춘분의 중간, 즉 3월 10일경이 되는데 이때쯤 그림을 떼어내고 창문을 열면 매화가 피면서 봄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추위를 이겨내는 방법 중 이렇게 낭만적이고, 시각적이고, 예술적인 방법이 또 있을까?
옛 조상들이 경험했던 겨울은 이 시대의 겨울보다 더 길고 더 혹독했을 것이다.
온돌이 있다 해도 창호지 문틈으로 들어온 매서운 겨울바람은 목화솜으로 누벼진 이불로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럴 때 선비는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린다.
춥고 고통스러운 하루를 잘 버티었다고 꽃 한 송이를 빨갛게 물들인다.
하루, 이틀, 사흘...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그렇게 방 안을 붉게 물들여 가다 보면 붉은색이 주는 따스함이 방 안의 차가운 공기를 덥힌다.
81송이의 홍매화가 가득 차면 설레는 마음으로 창문을 열어젖힌다.
마당에 심어놓은 매화나무에 푸른 싹이 났다.
잔뜩 화났던 바람도 어느새 유순해졌다.
바람 사이사이에서 봄내음이 묻어난다.
방 안에도, 그리고 마당에도 봄이 왔다.
잠시 선비가 되어 구구소한도를 그려보며 봄을 맞아보았다.
매화 한 송이 한 송이씩 붉게 채색해가며 춥고 힘든 시간들을 잘도 버텨내었구나 스스로 위로하고, 그러면서 또 새롭게 맞이해야 할 고된 하루를 버틸 힘을 내보았을 것 이다.
작은 꽃송이 하나 그리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비들이 붉게 채워나간 81송이의 매화꽃송이는 81일의 희망, 즉 선비들은 매일매일 희망을 그려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간 꼭 봄이 오리라는 희망,
오늘을 존버 하다 보면 푸쉬킨의 유명한 시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에서 나오는 기쁨의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그 희망을 말이다.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오듯,
우리들의 고단한 삶에도 반드시 봄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그 희망을 붓 끝에 담아 나도 매화 한 송이를 붉게 물들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