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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수현 May 06. 2020

엄마는 산책이 필요해

미국 출산, 그 후 (2)

차가운 요즘이었다. 달력은 봄의 숫자를 가리킨 지 오래지만 워낙 날씨 춥기로 유명한 이곳이지 않던가.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따스한 햇살 받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출산 후 3주 정도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일상 속 소소한 재미들은 '집콕'을 바탕으로만 이어져야 했다. '봄'이 왔는지, 혹은 벌써 제 일 다하고 떠나가버렸는지 그의 안부를 알기 쉽지 않은 날들이었다. 집 안에서 내다보는 햇살은 소설책 도입부에 한 가득 묘사된 풍경들 같기만 했다. 대충 그림은 그려지지만 내 손 안에 잡히지 않는 아련하고 희미한 풍경들. 해 뜨는 시각은 당겨졌는데 마음만은 왠지 늦겨울에 머물고 있는 것 같았던 출산 후의 날들. 그렇게 4월이 지났고 5월을 맞았다.


날씨가 너무 좋아
이런 날은 나가서  걸어줘야 하는데


왠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날이었다. 토요일 정오 무렵, 올해 들어 가장 반짝거리는 빛이 손등에 스미는 느낌이었달까. 점점 포근해지고 있는 줄은 대충 짐작으로 눈치채고 있었지만 더더욱이 '맑고 + 밝고 + 따뜻한' 기운이 휘휘 섞여 한가득 채워진 풍경이었다. 이런 날을 놓치면 일 년 내내 후회할 것만 같잖아. 365일 중 쉽게 찾아올 수 있는 날이 아닐 텐데. 며칠 전만 해도 상당량의 눈이 내렸던 이곳임을 되새겨본다면 말이지! "역시 이곳, 뉴잉글랜드답다"며 특유의 기후 현상에 감탄을 표하지 않았었나. 제대로 '봄 날씨' 찾아든 토요일 오후를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다. 이런 날은 나가서 좀 걸어줘야 하는데?


4월 말엽까지도 눈이 펑펑내리던 이곳. 이런 봄날씨는 흔치 않다고.
12월 아님주의. 뉴잉글랜드의 혹독한 봄날!


실컷 산책하고 '천천히' 와.


출산 24일차. 마침 어른들이 강조하시는 '삼칠일' 지났겠다, 포근한  날씨가 피처링 해주시겠다, 가벼운 외출을 시도해  만한 최적의 타이밍. '나가고 싶은' 마음이 일렁거리고 있을 무렵, 남편의  마디가 외출 욕망을 톡톡 건드리고야 말았다. "실컷 산책하고 '천천히' ."


짧은 한 마디 속에서 핵심은 바로 '천천히'. 내 입은 “잠깐만 거닐다가 빨리 올게...”라고 말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천천히'라는 부사에 기울어 있었다. 세 글자에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 인생 24일 차 아기를 재워두고, 남편의 육아능력을 믿고, 혼자서 하는 첫 산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 아파트 주변 한 바퀴만 얼른 돌고 올게. (천천히 올지도 몰라!)"


* 삼칠일 ; 3 x 7 = 21일의 시간을 신성하게 보낸  바깥공기를 쐬야 한다는 산후 규칙. 삼칠일 지나기 전에는 금줄을 대문에 걸어 두고 바깥 외출을 삼가야 한다는 일련의 금기가 전해진다.
동네 한 바퀴. 제가 한번 거닐어 보겠습니다.


바라만 봐도 푸근해지는, 느슨한 옷만 입다가 청바지를 챙겨 입고 구두 장착. 오랜만에 입고 싶은 대로 갖춰 입고 동네 한 바퀴 마실 나서기. 출산 후에도 여전히 배 일부는 남아있지만, (출산하면 바로 배가 쏙 들어가는 건 줄 알았던 1인) 볼록했던 무게감을 덜고나니 발걸음은 확연히 빨라졌다. 속도감이 제법 나는 '걷기' 몸짓이 제법 봄의 기운과 닮았다고 생각해본다. 겨울의 계절감만큼 무겁지 않고 가을의 어느 날처럼 우울하게 흩어지지 않는 적당한 경쾌함.


산들산들
하늘하늘
그날을 기록하는 예쁜 부사들
1시간. 천천히, 최대한 오래 머무는 느낌으로 이 산책을 즐길 작정.


이렇게 빨리 걷다 보면 오랜만의 산책마저 진짜 '빨리' 끝나버릴까봐 겁나잖아. 얼른 들어가겠다고 했으나 최대한 속도를 늦추고 느리게 호흡하고 싶은 모순된 욕심이 차올랐다. 천천히 산책하고 싶어서 자꾸만 걸음을 멈칫멈칫, 집 주변의 흔한 풍경을 자꾸만 핸드폰에 담아낸다. 이렇게 찍어둔 사진이 이미 수십 장은 있을 텐데, 봐도 봐도 예쁘다면서 찰칵찰칵. 출산 후, 혼자만의 첫 산책은 이런 식으로 '느리게' 걷는다. 빨리 끝내기 싫어서 ‘요령’을 피운다.

길이 예뻐서 자꾸 걷고싶댜고 되뇌는 순간들. T.S.Eliot의 가지않은길 (The road not taken)을 떠올려야만 한다고 생각해두던 지점.


방송하던 시절, 왠지 이런 날씨에 라디오 진행하면서 즐겨 틀었을 것만 같은 노래들만 모아서 '봄과 어울리는 노래'라는 꼬리표를 붙여 뱅글뱅글 재생해두었다. 너무 자주 들어서 진부해진 노래들마저  순간만큼은 신곡 감성이 된다. 산뜻하고 황홀하다.  번씩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  '봄의 풍경에 취해 걷고 싶던 마음' 양념된 덕분이겠지.  맛에 얼큰하게 취해서 모든  처음처럼 느껴진 덕분일 거야.


집 안에만 묻혀있던 지난 3주 간의 메마른 시간들을 따스한 봄 햇살에 널어두고 사뿐사뿐 걸어보는 기분. 처방받은 비타민 D 영양제로는 해소되지 않는 '햇빛의 시간'이 필요한 거였구나. 내 안에 품어야 할 기운은 결국엔 걸어야 완성되는 것, 내 발로 디뎌야 솟아오르는 것. 한약을 들이켜고 소문난 영양제를 물 몇 잔에 꿀꺽 삼킨다고 해서 내가 강해지는 건 아니었구나.



47분 정도가 지났다!


아파트 단지를 최대한 큰 둘레로 '두 바퀴'를 돌고, 망설이다가 흠칫 핸드폰 시계 보기. 여러 가지 질문이 스치는 이 순간. 그중에서도 이 세 가지.


혹시 아기가 너무 보채고 있으면 어떡하지?

남편이 혼자 너무 애쓰고 있으면 어떡하지?

예상 못한 돌발변수가 집에 생긴 거면 어떡하지?


평소에도 자주 품곤 하는 '어떡하지' 증후군. 뻔하디 뻔한, 단골 ‘어떡하지’ 질문에 마음을 살짝 시릴 뻔했으나 이내 다음과 같이 가벼이 정리해버리고 만다. 아기는 아까 내가 나올 때처럼 자세 하나 안 바꾸고 자고 있을 게 분명해. 아기는 나보다 남편이 훨씬 더 잘 보잖아. 나랑 있을 때보다 트림도 잘해. 그리고 말이야, 미국에서 여기 1년 넘게 살았지만 집 안에서 그 어떤 사건사고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고...! 걱정도 정말이지 습관이다.  

이렇게 걷는 게 얼마 만이지. 시꺼멓게 투영된 내그림자마저 반가워.


예상해뒀던 1시간의 산책 시간. 걷고 또 걷다 보니, 살랑살랑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이 봄바람처럼 마음에 스민다. 어쩐지, 징징 보채던 아기 표정마저 그립고, 가끔 눈을 맞추면서 '웃을 듯 말 듯' 모호한 미소를 짓는 표정도 고프다.


집이 떠나갈 듯이 네가 빽빽 운다고 해도 엄마 특유의 여유로 별것 아니라는  , 토닥토닥 쉽게 달랠  있을 것만 같은 강력한 기운이 생긴 것만 같아. 이래서 기분전환이라는  필요한 건가 . 쉬는 시간이라는  있어야 하지. 살짝 용기  공백의 순간들이 집콕 육아 , 지겨움이나 답답함 따위에 부정적일  있는 감정에 숨을 불어넣어  듯해.’


잠깐을 걷고 나니 다시 '집콕'하러 들어가는 발길도 그다지 무겁지가 않다. 두껍게 코트처럼 껴입은 계절감을 털어냈고  색채 담긴 풍경을 가볍게 걸쳐 입었으니, 아쉬울  없는 오후. 그렇게 다시 집으로. 그렇게 다시 24일차 육아의 길로.

한번만 더 뒤돌아 서서 보고싶던, 붙잡아두고만 싶던 예쁜 풍경. 이 고즈넉한 느낌, 파스텔로 슥슥 만지작 거려서 완성한 작품같아.


집은 멀쩡하다. 예상했던 대로 남편은 아기를 나보다 ' 돌보며', 집은 언제나처럼 무사히 '안전하다'. 내가 없으면 큰일  것만 같던 세계는 역시나 내가 없어도 아무 일이 없다. (이건 마치 흔한 퇴사 고민자들의 생각과도 닮았다. 회사는 내가 없어도 아무  없이  돌아가는 ). 어쩌면  평온해보는  같은 느낌이 드는  그저 기분 이겠지. '아내'이자 '엄마' 존재가 잠시  마실을 다녀와도 집의 온기는 여전했고  풍경처럼 가지런했다. 흐트러지지도 않았고 바싹 메마르지도 않았다. 그렇게 잠깐 '부재'해도 되는 거였다.


흔하게 올려다보던 하늘인데, 한동안은 보지 못했었거든. 4월 한 달은 네 얼굴을 상상하느라, 네 몸짓에 한없이 중독돼있느라


때때로 용기 내서 거닐어야겠다고 소심하게 다짐해보는 오후. 여전히 몸 구석구석, 산후 회복이 완전히 마무리되지는 않았겠으나 봄기운 받고 나니 더 ‘속성 ‘ 치유될 것도 같았던 날. 자꾸만 걷고 싶다는 욕심이 샘솟는다. 하루에 이렇게 1시간-2시간 정도만이라도 동네 한 바퀴, 두 바퀴,,, 아니 눈 딱 감고 세 바퀴라도 격렬하게 걸어볼까?


어르신들께서는 출산한 뒤 100일까지는 몸을 살살 움직여야 한다고들 하지만 이런저런 옛 금기들을 와장창 깨고 신나게 숨 가쁘도록 달리고픈 마음이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샴푸 향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답답하게 갇혀있던 집콕 일상에 콧바람을 들여주었으니 그럴 법도 하지. 3주 만에 제대로 바람 든 산모의 마음은 부드럽게 말캉해졌고 당장이라도 웃음기가 깃들 것처럼 입꼬리도 유연해졌다. 한 마디로 요약하건대 '기분이 좋아진' 오후였다.


엄마는 1시간만 걷고 올게


앞으로도 종종, 자주 웅얼거리게 될 것만 같은 이 한 마디. 작은 일탈, 소박한 외출 덕분에 그날 오후의 남은 육아는 '봄날' 같았으니... 거칠지 않았고, 둔탁하리 만큼 부담되지도 않았고. 바람 쐰 효과가 이 정도라면 이 정도 일탈은 할 만하겠어. 초보 엄마에게도 잦은 빈도로 산책을 허하면 좋겠다는 소소한 호소. 다리가 살짝 뻐근해지는 느낌도 이렇게나 반갑잖아. “그러니까 아들아, 엄마는 오늘도 1시간만 걷고 올게."


집앞에 이렇게 분홍분홍한 꽃이 피어있는 줄도 모르고 지냈던 미국의Stay home 일상.
너랑도 사뿐사뿐 같이 걸을 날이 찾아올거야
그날 오후의 그림같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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