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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A Oct 10. 2022

여기 '빛멍'도 있어요

자폐를 품고 살아가는 방법 (4화)

#불멍, #물멍이 인기 해시태그로 등장한 지도 꽤 되었다. 바스락바스락 타오르는 장작을 보면서 멍하니 고뇌에 빠지는 불멍, 한강둔치에서 바닷가 근처 예쁜 카페에서 잔잔한 물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물멍. 1분 1초 쪼개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도, 몸놀림이 아무리 빠릿빠릿한 사람도 물과 불 앞에서 '멍해지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조금이라도 한가한 걸 못 견디는 나 역시 종종 소위 '멍 때리고 있는' 비어있는 그 느낌을 절실히 찾을 때가 있다. 최대한 담백한 커피를 내려두고 불이 됐든 물이 됐든 '멍함'을 허용해야만 비로소 '힐링된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 멍함의 찰나는 예상치 못한 휴식을 이끌어내기도 하고 자기도 모른 채 감춰뒀던 상처까지 치유해 주는 역할을 해줄 때가 있다. '멍한 표정'은 비어있는 듯하지만 이렇게 또 갈증을 채워준다.



누구에게나
  '멍해지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덕분에 자폐에 대한 화두가 언론에서든, 사석에서든 자주 오르내린다.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천재 변호사라니... 게다가 사랑에도 빠지고, 의뢰인을 비롯해 동료 변호사들과 라포를 형성해나가는 과정도 제법 튼실한 인물. 아이가 '자폐'일까봐 늘 고민하는 부모의 입장으로서 우영우는 참 사랑스러우면서도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아무리 천차만별 증상의 '스펙트럼'이라지만 "저게 가능해?!"라면서.


스토리라인과 캐릭터가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면서도 가장 피부 깊숙하게 파고든 장면이 있었으니, 바로 맨 첫 화의 어린 우영우가 보여준 일련의 몸짓들. 드라마 속 아빠가 "영우야, 우영우!"라고 불러도 (호명)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 모른 척, 그저 창밖만 내다보고 있는 뒷모습. 창문 밖을 보며 '멍한 표정'을 내보이는 장면이었다. '스펙트럼'이란 말 그대로 자폐 징후를 가진 아이들 제각각 천차만별의 특징을 갖고 있지만 그중 많은 부모가 가슴 저릿하게 끄덕일 만한 장면이 바로 이 부분 아니었을까 싶다. 햇살이 내리쬐는 창문, 그 앞에 서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모습. 반짝거리는 햇살이 나뭇잎에 닿아 섬세하게 찰랑거리면 눈은 그 빛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따라갔다. 빛줄기는 찬란했지만 아이가 집중하는 강도가 셀수록 마음이 '철렁'하는 강도도 거셌다. 나는 그걸 '빛멍'이라고 불렀다.


ENA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화 방영분 중에서 (출처 네이버 이미지)


아닐 거야
우리 애가 자폐 일리 없어
단지 조금 느린 거겠지


부모 누구나가 그럴 것이다. '우리 애는 아닐 거'라고 믿는 동시에 '왜 하필 우리 애한테' 자폐 징후가 비치는 것일지 원망 한 자락을 얹는다. 아닐 거라고 믿고 싶은 매일이 반복되지만 아이의 '빛 멍'을 볼 때마다 때론 무서웠고 가슴 한 켠이 어두컴컴해졌다. 자폐임을 결국엔 인정해야하는가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어 주는 순간은 언제나 '빛멍'의 순간이었으므로. 말없이 서서 찰랑거리는 햇살을 멍하니 응시하는 아이. 아이가 제법 감성적이라고 뿌듯해하기에는 늘 '이상한' 순간들이었고 때론 기분이 오싹하기까지 했다. 새로 이사한 집의 2층 창문이 유독 예뻤는데 그 앞에 서서 햇살을 5분이고 10분이고 가만히 서있는 아이가 매번 마음에 걸렸다. 그 예쁜 공간은 결국 내겐 좀 뜨악한 창가가 되어버렸다. 불안이 거듭될수록 '피하고 싶은' 공간이 되었고 아이를 창가 곁에 두지 않으려 노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차라리 아이가 이렇게 칭얼거려줬으면 했다. "엄마 바깥 날씨가 너무 좋아!" "엄마, 햇빛이 너무 뜨거워. 눈을 못 뜨겠어!!"


아이의 '빛멍'을 볼 때마다


때론 무서웠고
가슴 한 켠이 어두컴컴해졌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자태로 긴 생머리를 하고 선 채 창밖을 내다보는 아이. 드라마 속 어린 우영우는 내 아이의 '빛멍'과 일치하는 모습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폐스펙트럼 징후를 결국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생각하게 만드는 결정적 순간. 또래 평범한 아이들은 잘하지 않을 것 같은 대표적 자스 성향의 행동, 빛멍.


재잘재잘 대길 좋아하고 쉴 새 없이 엄마 곁에 서서 뺨을 부비부비 해야 할 것 같은 시기에 물 멍, 불멍도 아닌 빛멍이라니. 그 '빛멍', 나만 하면 안 되겠니. 돌이 갓 지난 아기에게는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몸짓. 최대한 애써 모른척하고 싶던 내 아이의 오후 풍경.


아이가 빛멍 할 틈도 주고 싶지 않은 엄마의 얕은 욕심. 너의 감각 추구 시간을 애써 모른 척해두고만 싶은 마음.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싶은 날엔, 되도록 최대치의 흥분감을 고조시켜 아이랑 뛰쳐나가 보고 싶다. 아이가 빛멍 할 틈도 주고 싶지 않은 엄마의 얕은 욕심이랄까. 너의 감각추구 시간을 애써 모른 척해두고만 싶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엄마래도 잠깐은 좋다. 빛 앞에서 꼼짝도 않곤 선 너의 앞에서 "애가 참 의젓하네요. 감성적이네요" 칭찬 듣는 것도 지양하고 싶기만 한 이기적인 마음. 남들 눈에 이상해 보이는 게 여전히 두려운 ASD (Autism Spectrum Disorder) 초보 엄마는 도대체 언제쯤 이 모든 징후들에 쿨해질 수 있을까. 아이의 빛멍 순간이 찾아올까봐 때론 초조하고 불안한, 그리고 때때로 가슴 저릿저릿한 오후가 오늘도 참 무던히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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