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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석 May 31. 2023

푸코의 “성의 역사 1” – 이해하며 읽어봅시다 (1)

제1장 : 우리, 빅토리아 여왕 시대풍의 사람들

       


제1장 : 우리, 빅토리아 여왕 시대풍의 사람들     


                    

1) 17세기까지만 해도 성에 대한 표현이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흘러 다녔다. 그러나 19세기 무렵에 성은 생식 중심의 부부간의 성 활동만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벗어난 야생의 성은 유곽이나 정신분석의 영역으로 흘러갔다.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자신의 성생활을 어느 정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적 행동을 그다지 감추려고 하지 않았고, 성에 관해 극도로 조심스럽게 말하지”도 않았다. 17세기 사람들은 성에 대하여 아무 말이나 부끄러움 없이 내뱉었고, 공개된 시야에서도 위반과 노출이 빈번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사람들은 성을 ‘가족 내 부부중심의 성 활동’ 만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였고 ‘생식기능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가정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생식기능에서 벗어난 성활동은 내몰리고 침묵을 강요당하였다. 예를 들면 어린이의 성이 그랬다. 어린이의 성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해지지도 알려지지도 않아야 했다.      

     

이처럼 부부 중심의 생식을 기본으로 하는 성생활만이 존재해야 하는 위선적 부르주아 사회에서 비합법적인 야생의 성은 이윤의 회로에 편입되어 갔다. 유곽과 요양원(정신병원)이 그곳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생식 중심의 성에서 벗어난 성은 창녀와 고객 관계, 히스테리 환자와 정신과 의사 관계(프로이트는 히스테리 병인을 성적 억압으로 보았다)에서 거래되었다. (관리되었다고 말해도 된다.)       


        

2) 근대인들은 성이 억압되어 왔다는 담론을 받아들였고 이런 가설은 더욱 강화되어 왔다. 이처럼 성 억압가설이 꽃피웠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자본주의 시대에 노동력이 노동생산성을 벗어나 성생활에 소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성을 억압했다는 해석이 있다. 다음은 성이 무엇인가에 억압되어 있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존재한다는 해석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근대에 이르러 성이 억압되었다는 담론은 분명히 계속되고 있다.” 17세기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성에 대한 억압가설을 자본주의와 연결하여 해석하려는 사유가 많아지기 시작하였다. 억압가설이란 부르주아들이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성적 에너지가 재생산과 관련되지 않는 다른 곳에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성과 권력의 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토록 만족감을 주게 되는 데에는 아마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성은 억압당하고 있었고 근대인들은 성에 대한 위반의 몸짓을 자유와 해방의 운동으로 해석하려는 사고가 매력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푸코는 부당한 세상에 저항하며 억압에 맞서 자유와 해방을 위해 투쟁한다는 사고가 오늘날 만연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성적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일련의 행동이 권력의 억압에 저항하는 행동으로, 자유를 쟁취하려는 투쟁으로 해석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3) 푸코는 자신이 자료를 조사해 보면 성이 억압당해온 것이 아니라, 성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넘쳐나고 그 웅성거림이 곳곳에서 들려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의문을 제기한다. 왜 성담론이 흘러넘치는데 사람들은 성이 억압받아왔다고만 생각하는 것인가?           


푸코가 “제기하려고 하는 물음은 ‘왜 우리가 억압받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가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그토록 커다란 열정과 강렬한 원한을 품고서 스스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는가’이다”. 즉 성에 대한 담론은 넘쳐나는데 왜 성이 억압받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는가가 푸코 의문이다.          


그래서 푸코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어떤 경로를 통해 우리는 --- 성이 부정된다고 단언하고 ---- 우리가 성을 침묵으로 몰아간다고 말하기에 이르렀을까? 왜 그토록 우리는 성과 죄를 밀접하게 연결시켜 왔는가? 왜 우리는 예전에는 성을 죄악시하다가 지금은 그에 대해 반성하며 성의 해방을 이야기하는가?”               


 

4) 푸코는 성의 억압 가설에 대하여 세 가지 의문을 가진다.          


① 첫 번째 의혹 : 성의 억압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가. 실제 성의 억압이 있었나.    

      

② 두 번째 의혹 : 사회 전반에 작용하고 있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정말로 억압의 형태를 띠고 있는가. 즉 권력은 억압장치를 사용하여 지배를 지속하고 있는가. 혹시 권력은 억압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통치를 하지 않을까.           


③ 세 번째 의혹 : 억압에 대항하는 비판적 담론이 실제 권력 메커니즘의 일부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즉 억압을 비판하는 논리가 결국은 억압 담론의 확대만을 가져오는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푸코는 성의 억압에  대한 비판이 결국은 성담론을 통한 통치효과를 가져온다고 본다.)         



5) 푸코가 억압가설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푸코는 자신의 담론가설'-성에 대한 이야기의  풍성함으로 통치하는-을 주장하기 위해 억압가설을 부정한다.)        

 

① 먼저, 그의 관심은 근대 사회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성을 담론의 차원에서 살펴보는 데 있다.      


즉 1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성의 현상을 ‘억압가설’이 아니라 ‘담론가설’로 보자는 것이다. 담론이란 ‘어떤 인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드는 지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어보자. 조선시대 살았다면 그 당시 지식으로 세계를 인식하듯이 성에 대한 특정한 지식이 있다면 그는 그 지식으로 성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히려 17세기 이래 근대 사회의 내부에서 성에 관해 행해진 전반적인 담론의 경제(체계) 속에 이 가설을 다시 놓고 살펴보자는 것이다”. “요컨대 성에 관한 전반적 ‘담론현상’과 ‘담론화’를 고찰하는 것이 요점이다.” 즉 어떻게 ‘성에 대한 특정한 시각’을 체득하게 하여 사람들의 성을 통치하였는가를 알아보자는 것이다.      


② 다음으로는 권력이 어떤 형태로 어떤 경로를 따라 개인을 통치해 들어오는가를 알아보자고 한다.      


이를 푸코는 “어떻게 권력이 일상의 쾌락에 침투하여 일상의 쾌락을 통제하는가”를 알아보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권력의 다형적 기술”을 아는 것이 중요하게 된다. “권력의 다형적 기술”로 개인을 통치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다형적 기술”이 일상의 쾌락을 통제하는 방식은 강제적이지 않다. 하나의 예를 들면 위생학 같은 학문과 공공위생을 결합하여 개인을 통치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학문인 위생학의 지식을 체득하며 위생관념에 따라서 행동한다. 이처럼 스스로 주체성을 발휘하며 지식을 받아들이며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권력의 다형적 기술을 통한 통치방식이다.  

         

③ 끝으로, 권력이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 ‘지식의 의지’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여기서 지식이란 플라톤이나 뉴튼 같은 어떤 위대한 인물이 창조한 지식이 아니다. 푸코에게 지식이란 어떤 개별적 지식이 사회적 관계, 제도 속에서 다른 지식보다 힘을 확보하고 보편성을 획득했을 때 이를 (힘과 보편성을 획득한) 지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각각의 개별적 지식 중 어느 하나가 보편적 지식의 힘을 얻어가며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과정을 지식의 의지가 작동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동물이나 식물을 분류하는 분류표를 보았을 것이다. 이 분류표는 서양에서 특정 시기에 어떤 상황에서 만들어진 분류표이다. 지구의 여러 시공간에서 다른 삶을 사는 토착민들은 각자의 전통 속에 전해지는 (제례, 식용 등등) 분류표가 있었다. 그러나 서구의 특정 분류표가 힘을 확보하고 보편성을 얻어 보편적 지식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푸코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이는 지식의 의지가 작동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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