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단정한 심연의 시#16

by 임상



지평이 꿰뚫은 매니큐어의 춤


나는 다섯까지만을 세었던 신이 만든 실수


태초에는 울음도 웅웅 거리는 소리에 불과해


틈을 지져서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는

밑창이 끊어진 신발 안에 이 뼈들을 접어서

집어넣는 게 지금의 전부였다



번뇌가 천둥을 말살하고 쏟아지는 궤변의 오후


냉기로 닦은 안경테가 심장의 테두리를 도려내며


즐거움이 식으면 남는 게 뭐야

떨어지는 눈물에 살해당하며 네가 물었다


고작해야 창자에 왁스칠을 하며

영하의 온도에서 당신의 잔해를 굽는 것이


겨우 내가 건네는 고해였음을



뜯겨나가는 바다 위에서 돛이 시든

갑판에 목을 묶고 최초의 수평이

나의 척추를 가로지를 때까지

나는 조금 더 죽어볼래


떠다니는 무릎 사이로 건너오는

잘린 펜들의 끊어진 쉼표가 너무 쉽게 도망쳐왔다

해가 뜨지 않아도 내일이 온다면

영혼의 심을 뽑아 하루는 귀가 잘린 도마뱀이 되어볼까 그리고

눅눅히 꿈을 꾸어야지



아직은 얼음이 얼지 않는 오후


지금도 들려오는 세면대에서의 통곡에


상처의 진물을 닦아낼 관심도 말살된 복도


어느 문이든 열고 들어가 그 발 밑에


나를 놓일래 책장을 넘기는 소리마다


살점이 베여 나갔다 그래도




나는 여기 있어

여기서 살아 있어



독을 짓는 손톱에서 고작해야 장난이 전부인

잠들지 않는 네 발 짐승의 시체를 끌어안고


주사 바늘로 뽑아내야 하는 무수한 기억들


여기에 있으려면 저기를 기워야 해


있잖아 보고 싶어 하는 게 죄가 될 수 있어?


웃음으로 슬픔을 매도하는 나날




그래도

나는 여기 있습니다


















<시의 곁, 잠시 발을 담그는 어느 독자의 코멘트>


「여기서」는 존재의 불안을 잔혹한 이미지의 연쇄로 밀어붙인다. 특히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가운데 끝내 존재의 자기 증언으로 수렴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첫 연의 “지평이 꿰뚫은 매니큐어의 춤”에서 이미 시적 주체는 세계와 전혀 매끄럽게 맞물리지 못하고, 단절과 파열의 언어 속에서만 자신을 증명한다. ‘페인트 냄새’, ‘끊어진 신발 밑창’, ‘창자에 왁스칠’ 같은 표현은 일상적 사물을 낯설게 비틀어 육체의 고통과 언어의 기괴함을 겹쳐낸 장치로 작동한다. 이 장치를 통해, 화자 자신을 비롯한 인간이 서 있는 세계 자체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기형적인지가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이미지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세계와 주체의 불협화음을 시각화하는 셈이다.

시의 중반부에서 특히 인상적인 건 “떠다니는 무릎 사이로 건너오는 / 잘린 펜들의 끊어진 쉼표” 같은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는 쓰기와 말하기, 기록과 단절의 경험이 육체적 절단의 이미지로 치환되며, 글쓰기의 행위 자체를 상처의 은유로 데려간다. 글쓰기와 언어는 보통 자아를 지탱하는 도구이지만, 이 시에서는 오히려 상처와 단절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언어조차 균열나고 절단된 흔적으로서만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도 시적 주체는 자기의 고해(告解)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가 절망만으로 귀결되지 않는 것은, 마지막 연들의 반복적 선언 때문이다. “나는 여기 있어 / 여기서 살아 있어”, 그리고 끝내 “나는 여기 있습니다”라는 종결은, 비록 주변은 부패와 고해와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세계라 해도, 자기 존재를 ‘여기서’ 붙들고자 하는 저항의 언어다. 즉, 파괴적인 이미지들로 구축된 무대 위에서 결국 살아남는 건 자기 존재를 고백하고 붙드는 “목소리” 하나뿐이다. 그래서 이 시는 고통의 묘사 이상으로, 버티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처럼 읽힌다.

이 고백은 단순히 자기를 위무하는 차원을 넘어, 파괴된 언어와 이미지들 위에서 세워지는 유일한 긍정의 증언이다. 세계는 붕괴하고 언어는 절단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 주체는 “여기서”를 붙들며 살아 있음을 말한다. 이때 ‘여기서’라는 부사어는 단순한 장소 지시가 아니라, 존재가 자기를 고백할 수 있는 현재적 순간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는 상처와 단절의 언어를 통해 도달한 존재의 가장 작은 긍정을 드러내는 시다. 고통의 세계에서조차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지 않으려는 언어의 몸부림, 그것이 이 시가 독자에게 남기는 울림이다.
keyword
화, 금 연재
이전 15화조금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