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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옫아 Feb 14. 2024

박찬욱 감독 복수 3부작과 3가지 질문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복수 3부작과 3가지 질문 



최근 한 달 동안 주말에 한 편씩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을 넷플릭스를 통해 보았다. 세 작품 모두 ‘복수’라는 키워드 하에 묶였다. 복수의 사전적인 뜻은 ‘원수를 갚음’이다. 때문에 복수와 관련된 이야기엔 필연적으로 복수를 실행하는 주체와 복수의 대상인 타자 그리고 복수의 원인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복수 3부작을 러프하게 요약한다면 ‘어떠한 사건이 원인이 되어, 주체가 타자를 향한 복수를 시작한다.’가 될 것이다. 복수에게 원인과 결과는 어떤 것일까. 복수의 동기가 원인이고, 복수라는 행위 자체가 결과인가. 그렇다면 복수라는 행위가 종료된 이후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정말 복수는 제대로 행해졌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비추어 박찬욱의 일명 복수 3부작에 대한 작품 이야기를 각각 이어가고자 한다. 







<복수는 나의 것> : 복수(複數)의 복수(復讐). 그래서 복수는 누구의 것인가? 


영화 속 저마다의 주체들이 외친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은 아주 작은 우연들을 거듭하며 파국으로 향한다. 주인공 ‘류’는 그저 아픈 누나를 위해 본인을 희생하고 싶었고, 부당한 실직으로 인해 부의 이동만 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 작은 행위가 나비효과처럼 본인을 포함한 총 8명의 사망자를 만든다. 의도는 정녕 그게 아니었음에도 빗나간 선택들이 최악의 결말을 향해 도미노처럼 쓰러진다. 


너 착한 놈인 거 안다. 그러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영화 속 갈등과 인물들의 관계는 첨예하게 얽혀 있고, 사건은 정말 ‘꼬이고 또 꼬인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다. 그래서 복수를 이윽고 손에 얻고 성공한 자는 누구인가. 최선의 선택을 최악으로 만들었던 불법 장기 매매업자들을 향한 복수에 성공한 ‘류’인가. 사랑하는 딸이 억울하게 죽은 그 강물에서 유괴범을 두 발 못 떼고 무기력하고 잔인하게 죽게 만드는 데 성공한 ‘동진’인가. 영화 말미에 영미를 죽인 동진을 향한 복수에 성공한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인가. 


영화의 막이 내렸을 때 나는 분명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에게 복수를 하러 갈 또 다른 복수 주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를테면 동진의 전 와이프나 동진에게 아들 수술비를 받은 최반장일지도 모른다. 복수의 대가 끊기지 않는 이 영화는 복수가 끝나가려나 싶을 무렵에 또 다른 복수를 부른다. 그렇게 복수(複數)의 복수(復讐)가 되어간다. 혹은 복수(復讐)의 복수(複數)이거나. 누구든지 아주 작은 우연을 만나 복수의 주체이자 타자가 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복수는 영화 속 다양한 ‘나’들의 것이자 동시에 영화 관람객들의 것이다. 작은 방심도 금물. 정말 말도 안 되게 사소한 계기로 복수의 타겟이자 복수를 행하는 자로서의 역할을 쉽게 부여 받을 수 있으니. 그리하여 이윽고 복수가 나를 부를지도 모르니.


+ 우연이 만든 파국, 이라는 키워드를 영화 <복수는 나의 것> 포스터에서 쓰고 있으나, 정말 우연인 걸까. 복수의 대상을 본인의 신원 보호 문제로 아무렇지 않게 옆 사람으로 바꾼 류의 선택을 우연이라 부를 수 있는가. 귀가 들리지 않아서 유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류의 운명을 진정 우연이라 일컫을 수 있는가. 





<올드보이> : 너에게 마땅한 형벌인가? 아니면 나를 향한 길고 긴 형벌인가? 

영화 <올드보이>는 복수에 ‘진심’인 이우진이 한 치의 혀를 잘못 놀린 오대수를 향한 집착 어린 복수극이다. 그러나 영화 말미에 이르러 이우진이 정말로 복수하고 싶었던 것은 누나의 손을 놓아버린 과거의 자신임을 알게 된다. 


15년을 감금시키고 그 후의 일들을 완벽하게 설계할 정도로 체계적인 이우진. 그러나 복수의 매커니즘을 역으로 돌아간다면 정말 오대수가 이우진의 복수대상이 맞는지 점검할 필요성이 있다. 물론 오대수가 이우진과 이수아의 애무 장면을 본 것은 맞지만, 친구 주환에게 전달할 때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도 아니고 간략하게만 이야기하고 “어디 가서 얘기하면 죽는다”까지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정작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은 오대수의 몫이 아닌 그 이후의 책임임에도, 이우진이 오대수를 복수의 대상으로 설정한 이유는 “모래알이든 바위든 가라앉는 건 마찬가지”라는 개인적인 가치관 때문일 것이다. 누나를 잃은 상실감과 모든 죄의식을 오대수가 치뤄야 함이 마땅하다고 판단하고 복수를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의 몫을 향한 예언과 같은 대사를 외친다.  


복수심은 건강에 좋다! 

하지만, 복수가 다 이뤄지고 나면 어떨까? 

아마 숨어있던 고통이 다시 찾아올 걸?


이우진의 복수는 본인과 똑 같은 환경-자기와 같은 근친상간의 죄를 마주하게 하는 것- 속으로 오대수를 몰아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대수에게 묻는다. 이우진 본인은 다 감수하고도 누나를 사랑했으나 당신은 그럴 수 있냐는 것. 어쩌면 이우진이 그 오랜 시간과 정성을 투자해 오대수를 향한 복수극을 시작한 것은 스스로 속죄하고 형벌을 내리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누나의 손을 놓은 나 자신을 미치도록 저주하고 미워하지만, 그 에너지를 ‘나’가 아닌 타인에게 풀기 위해,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하는 누나의 죽음과 함께 누나를 잃은 자신의 고통에 대한 죄값을 단 한 명의 타인에게 지게 하기 위해, 그리도 지독한 복수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대수를 향한 복수가 성공했다고 해서 자신이 면죄부를 얻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복수가 막을 내렸다는 허탈감, 자신의 삶은 이제 복수라는 목적지가 없다는 상실감, 그리고 누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신에 대한 분노감으로 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긴다. 


+ 어쩌면 오대수의 죄명은 소문의 주범이 아닌 완전한 망각일지도 모른다. 





<친절한 금자씨> : ‘너’를 대신한, 그리고 ‘너’에게 속죄 받기 위한 ‘나’의 복수는 성공했는가? 


<올드보이>의 ‘나’가 복수의 주체이고 ‘너’가 복수의 대상이라면, <친절한 금자씨>의 ‘나’는 동일하게 복수의 주체가 맞지만, ‘너’는 복수의 대상이 아닌 속죄의 대상이다. 복수의 대상을 향한 여정에는 금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백한상에게 납치당하고 죽은 아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존재한다. 이때 ‘너’는 바로 피해 아동 중 하나인 원모. 


금자는 자기의 딸을 인질로 잡은 백한상을 대신해 살인범이 되어 교도소에서 13년 복역을 마친 후, 교도소 안에서 ‘친절한 금자씨’로 활동하며 얻은 관계들을 활용해 복수극을 시작한다. 복수를 향하는 여정 속에서 피해 아동이 원모 하나만이 아님을 알게 되고, 그 외의 피해 아동들의 가족을 불러 사적인 복수를 실행한다. 일명 ‘백선생’을 향한 유족들의 분노가 가득했기에 금자는 복수를 그들에게 양보한다. 잔인한 죽음을 맞이한 백 선생의 시체에 총을 쏘는 액션으로 막을 내린 복수극. 이후 금자는 유가족들이 한때 백 선생에게 보냈던 아이들의 몸값도 돌려주는 과정까지도 실행한다. 그렇다면 금자는 아이들과 가족들 그리고 자신의 복수에 성공했는가? 


 복수는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구원은 막을 내리지 않았다. 금자는 어린 원모의 환영을 발견하고 사죄하려고 했으나, 원모는 백 선생이 물었을 법한 재갈을 금자의 입에 물려버린다. ‘너’인 ‘원모’를 대신한, 그리고 ‘너’에게 속죄 받기 위한 복수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그 성공이 용서 또는 구원이 되진 않는다. 


이금자는 어려서 큰 실수를 했고, 

자기 목적을 위해 남의 마음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그토록 원하던 영혼의 구원을 끝내 얻지 못했다. 

그래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금자 씨를 좋아했다.

안녕, 금자 씨. 


+ 개인적으로 복수 3부작에서 영화 <친절한 금자씨>가 가장 내 스타일이었다. 금자씨라는 캐릭터를 따라가는 여정이 즐거웠고, 연극적인 요소가 많아서 멍하니 몰입했다. 





복수 3부작은 이처럼 복수에 대한 저마다의 단상을 그려낸다. 복수의 대상과 주체는 느닷없이 내가 될 수도 있고, 복수의 목적과 과정은 때론 길을 잃는다. 그리고 복수가 끝난 뒤 남겨진 것은 어떠한 영광도 아닌 평생을 바칠 구원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복수의 아이러니이자 삶의 아이러니이니까. 끊임없는 우연성을 마주하고, 매 골목마다 나를 덮쳐오는 질문에 충실히 답하는 것이 삶임을 또 한 번 영화를 통해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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