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었다.
아주 고대하고 고대하던 여행이었는데,
여행 전날에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여행 갈 생각에 신나는 마음보다도 여자친구와 헤어진 생각에 친구네 집에서 술을 마신 게 화근이었다.
그나마 짐은 싸 놔서 다행이지.
급하게 집에 들러 짐을 챙겨 나왔는데,
여권을 놓고 온 것을 깨닫고 또다시 집에 들렀다.
대단하다.
이 놈의 건망증,
대체 뭐가 문제길래 계속 깜빡깜빡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코올성 치매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친구에게 고양이를 맡기려고 간 김에 딱 한 잔만 한다는 게...
전 여자친구에 대한 한탄으로 인해 한 잔이 네 병이 되어 버린 마법에 빠진 것이다.
어차피 늦었고, 내 잘못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 법.
친구들은 이미 수속을 마쳤다고 하는데 나는 탈 수나 있을까?
같이 여행에 참여하는 친구들은 내게 쉴 새도 없이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다.
나도 쉴 새 없이 사과를 하며 달리고 있었다.
다음에 올 공항버스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질 않아 택시를 타고야 말았다.
내 월급의 팔 할은 택시와 우산이란 걸 증명하는 순간이다.
애꿎은 택시 아저씨를 원망하며 휴대폰 속 시간만 쳐다보고 있다.
달리고 달려 겨우 공항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다.
스마트 티켓을 받아 놨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키오스크를 찾았다.
아무리 봐도 이 넓은 공항에 키오스크가 보이지 않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키오스크가 없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너무 많은 인파 속에서 창구를 찾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다행히 저 멀리 친구가 서 있는 창구에 줄을 섰다.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내 차례다.
친절한 여직원이 나를 맞이했다.
창구 직원에게 말을 걸려 하는데, 여직원은 내 얼굴을 보더니 순간 표정이 굳어 버렸다.
혼잣말을 하면서 급하게 탑승자 명단을 뒤적뒤적거리더니 그 여직원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사색이 된 표정으로 여기 아닌 것 같다고 가라고, 가라고 손짓을 해댔다.
잘못 왔다며 나를 돌려보내는 것이 아닌가.
이해할 수가 없다.
내 옆에 친구들은 수속을 마치고 게이트로 향하는데 나만 계속 딜레이가 되는 것이다.
신분증과 여권을 들이밀어도 가라고만 할 뿐이다.
화가 나서 따지려는데 내 뒤에 있는 여자가 짜증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저기요, 제가 먼저 해도 될까요? 저도 늦었거든요.
그쪽 때문에 기다리는 거 안 보여요?
저도 저걸 타야 한다고요.'
'이봐요, 난 아직 시작도 안...'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직원은 뒤에 여자부터 처리해 준다고 말한다.
내 생에 어이가 없는 순간이 몇 안 되는데 지금이 그중 하나였다.
뒤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분노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걸 느끼고 나서야 한 켠으로 비키게 되었다.
내 뒤에 여자는 빠르게 마치고 게이트로 향하고 있었다.
기가 막힌 스피드였다.
친구들은 이미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안 오냐고 난리를 던 친구들은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 뒤 여자가 내게 비키라고 한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비행기는 출발했다.
나를 안 들여보내주던 직원보다 친구들이 더 야속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의 첫 해외여행은 시작부터 어긋나 버렸다.
비행기는 떴고, 그 많은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아니 한 사람만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여직원, 여직원이 이상하다.
그제야 본인이 착각했다고 한다.
자신이 탑승자 명부를 잘못 파악했다며,
당분간은 기상악화로 비행기는 뜨지 않는단다.
이렇게 쨍하게 해가 내리쬐는 한여름에 기상악화를 논하다니.
기가 찰뿐이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이상함을 느꼈다.
정말 나와 그녀 말고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비장한 표정을 지은 상태로 그녀는,
비행기 일은 미안하게 되었다며 나를 따라오라며 어딘가로 끌고 갔다.
끌려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체구도 작은데 힘이 엄청났다.
친구들이 향한 게이트에서 꽤 먼 곳에 있는 환하게 빛이 나오는 게이트로 날 데려갔다.
그 빛 사이로 나를 밀어 놓고는 내 손에 쪽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여직원은 일단 여기서 대기하고 있으면 누군가 오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 사람을 따라가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나 서 가차 없이 그 게이트를 닫아 버렸다.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도 않는다.
뭐 저렇게 당당하고 뻔뻔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