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칭기즈칸의 상징은 9개의 야크 꼬리를 가진 흰색 깃발로 결정됐다. 이후 이 깃발은 대륙의 동쪽 끝 고려에서 인도, 중동, 서쪽의 동유럽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을 공포로 물들였다.
칭기즈칸은 다양한 부족 간의 다툼을 방지하기 위해 야삭(법률)을 제정했다. 칭기즈칸의 야삭은 여성의 납치를 법으로 금지시켰다. 약탈혼으로 태어난 아이가 자라서 여성의 약탈을 법으로 막았다.
칭기즈칸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했다. 야삭은 종교의 자유를 천명한 인류 최초의 법전이다. 칭기즈칸은 자신의 하늘(텡그리)은 곧 모든 사람의 하늘이라 믿었다.
금의 장종(章宗)이 서거했다. 후계자는 영제였다. 그는 사절을 보내 칭기즈칸에게 신하의 예를 갖춰줄 것을 요구했다. 무릎을 꿇고 황제의 칙서를 받으라는 얘기였다. 칭기즈칸은 남쪽을 향해 탁하고 침을 뱉었다.
“내가 왜 그런 자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나?”
금은 여진족의 나라다. 여진족은 그곳의 주인이었던 거란(契丹)족을 몰아내고 화북 땅을 차지했다. 거란족은 과거 그곳의 주인이었던 한족들을 양자강 남쪽으로 쫓아냈었다. 남으로 옮긴 송(宋)은 남송(南宋)으로 격하됐다.
당시 금나라의 인구는 5000만이었다. 몽골 고원 전체 인구는 모두 합쳐봐야 300만 남짓이었다. 금나라에는 잘 조직되고 훈련된 군대가 있었다. 그런데도 칭기즈칸은 대금 전쟁을 선포했다. 금나라 영제의 반응은 퉁명스러웠다.
“어떻게 너희 따위를 두려워하랴.”
1부 리그 팀은 2부 리그의 상위팀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1부 리그 팀도 이미 과거의 찬란했던 팀이 아니었다. 칭기즈칸은 거란족에게 금으로 가는 길을 요구했다. 거란은 금과 몽골 사이 완충지대에 있었다. 거란족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들을 몰아낸 여진족에 대신 복수를 해주겠다니 오히려 반겼다.
거란족은 칭기즈칸에게 과외교사 노릇까지 자청했다. 그들을 통해 조금씩 정주사회를 이해했다. 정주사회 군대와 싸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문화가 다른 그들을 다스리는 일은 여간 복잡하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거란족 야율초재를 중용했다. 칭기즈칸은 그를 통해 말 위에서 세상을 정복할 순 있어도, 말 위에서 세상을 다스릴 순 없다는 통치 개념을 배웠다.
정주사회에 동화된 거란족은 몽골에서 원(元)제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당시 거란족 가운데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이 많았다. 그들은 자녀의 이름을 심온(審溫․Simon) 보육사(保六賜․Paul) 아고(雅古․Jacob) 악난(岳難․John) 같은 기독교의 세례명을 따서 지었다. 한편 중동에서 온 무슬림들은 숫자에 능했다. 칭기즈칸은 그들을 제국의 재정분야에 투입했다.
몽골은 개전 초반 금에 큰 타격을 입혔다. 전쟁은 기병부대 간의 싸움에서 결판났다. 금은 일찌감치 핵심 기병부대를 잃었다. 칭기즈칸의 기병은 거침없이 화북의 평원을 질주했다. 그러나 이내 성벽이라는 낯선 장애물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말이 넘기엔 너무 높은 장벽이었다.
중국 대륙 정복에는 두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첫 째 단단한 성벽이었다. 이를 위해 몽골은 다양한 공성(攻城) 무기를 도입했다. 중동에서 수입한 투석기로 크게 효과를 보았다.
정작 몽골군을 더 괴롭힌 것은 끈적거리는 기후였다. 성벽은 신무기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습기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끈적거림과 벌레는 두고두고 몽골부대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금의 완전한 정복은 칭기즈칸의 아들 대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칭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은 전쟁의 목적부터 달랐다. 이는 유목민과 정주민의 차이와 다름없었다. 정주민들의 전쟁 목표는 성을 빼앗는 것이었다. 유목민은 오로지 성 안 재물의 약탈에 집중했다.
군사들은 물론 주민들까지 죽였다. 하지만 칭기즈칸의 후손들은 되도록 불필요한 살상을 금했다. 적을 포로로 잡아 다양하게 활용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게 됐다.
동양이나 서양의 정주민들은 유목민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성(城)을 쌓았다. 말이 뛰어넘지 못하도록 해자를 두르고 성벽을 높이 올렸다. 성(城)은 정주민의 삶이 집약된 곳이다.
인간이 함께 모여 살며 성을 짓고 도시를 이룬 것은 약 1만 년 전부터다. 그보다 2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지구의 많은 동물들이 사라지는 대멸종을 겪었다. 인류도 식량 부족으로 덩달아 멸종 위기에 처했다.
인류를 구한 것은 농사라는 새로운 기술이었다. 약 1만 년 전 팔레스타인 유역에 최초의 농사 흔적이 발견된다. 아프리카를 벗어난 인류가 처음으로 정착한 곳이다. 이후 농사에서 얻은 탄수화물은 인간의 주 영양원으로 급부상했다.
인간은 함께 모여 집단 거주를 시작했다. 소규모 무리로 사냥이나 채집을 다닐 때와는 다른 삶의 형태가 생겨났다. 도시가 형성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성이 건축됐다. 팔레스타인과 가까운 터키 남동부 지역에 최초의 도시가 들어섰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인 괴베클리 테페다. 터키어로 ‘배불뚝이 언덕’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해발 760m 언덕 정상에 위치해 있다. 적의 침입을 발견하고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다.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7천 년이나 앞선 신석기 시대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