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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Oct 23. 2022

몽골제국과 양자강 16

드림팀


칭기즈칸은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단일 국가로는 인류 역사상 최대 영토였다. 창업주가 죽자 그의 유산을 놓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제국을 이끌어 갈 다음 칸은 누가 될까.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종합하면 두 개의 쟁점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우선 ‘쿠릴타이’로 불리는 몽골의 독특한 칸 선출방식이었다. 칸은 세습이나 지명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칸은 선출직이었다. 나중에는 세습제로 바뀌었지만. 따라서 누가 더 많은 표를 얻을까 문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선거는 종종 엉뚱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두 번째는 왕위 계승 후보들 면면이었다. 조건은 단 하나 칭기즈칸의 아들이어야 했다. 명목상 1순위인 장남 주치는 이미 사망했다. 주치의 아들 바투는 당시 ‘사인 칸(훌륭한 임금)’으로 불리고 있었다. 

칭기즈칸의 후계자로 손색없었다. 하지만 그는 거리상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바투의 본거지는 러시아 초원이었다. 몽골 본토의 지배권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누가 돼야 하나.

몽골의 ‘쿠릴타이’는 요즘으로 치면 국회나 마찬가지다. 8백 년 전 칸의 선출은 놀라울 정도로 민주적이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선거의 결과가 늘 최상일 순 없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최악의 정치’라고 불렀다.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다중의 어리석음을 지켜본 그는 무지한 다수보다 눈 밝은 철학자 한 명에 의한 정치에 더 큰 기대를 걸었다. 

중국은 7명의 정치국 중앙상무위원들에 의한 집단지도 체제다. 시진핑 당 총서기도 그들 중 한 명이다. 그들은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다. 엘리트 코스에 의해 길러진 인재 풀 가운데서 발탁된다. 개인기 위주의 미국식 민주주의와는 다르다. 미·중의 대결은 곧 이 두 방식의 충돌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방식은 느리고 어리석게 보일 때도 있다. 솔론(기원전 638~558) 시대 어느 외국의 왕이 아테네를 방문했다. 당시 아테네의 시민은 민회에 참여하여 직접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왕은 민회의 투표 장면을 지켜본 후 “현명한 사람들은 발언만 하고 정작 바보들이 중대 사항을 결정하는 군요”라며 비꼬았다. 민주주의는 수 천 년의 정제 과정을 거쳐 시나브로 완성되어 가는 중이다.         

몽골식 민주주의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칭기즈칸을 이을 새 칸으로 선출된 인물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경쟁자였던 차가다이는 그보다 훨씬 유능했다. 군사적인 업무나 행정처리 능력에서 나무랄 데 없었다. 하지만 유능함은 때로 민주적 절차를 거치는 동안 부담감으로 작용한다.  

유능한 권력자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자신과 동일한 자질을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주변사람들에게 주는 불편함을 간과한다. 마침 그들에겐 권력자를 선택할 자격이 주어졌다. 차가다이는 쿠릴타이 참석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칭기즈칸의 막내 톨루이는 위대한 전사(戰士)였다. 이슬람 역사가 라시드 앗딘은 “톨루이 만큼 많은 나라를 정복한 사람은 없다”며 그의 전쟁 수행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늘 아버지의 곁을 지켰다. 장군들은 그를 존경했다. 항상 전투에서 앞장을 섰기 때문이다. 

1,2차 대전에 참전한 영국의 귀족들은 “전쟁에서 선두에 서는 일만큼은 결코 양보할 없다”고 주장했다. 앞에 나선 자는 그만큼 죽을 확률이 높다. 영국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이튼고교 졸업생 중 2천 명이 1,2차 대전서 전사했다. 귀족들의 명예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몽골의 관습은 ‘전사’ 톨루이에게 유리했다. 몽골에선 막내를 ‘화로의 수호자’라고 부른다. 몽골족은 장남을 비롯한 아들들을 순서대로 초원의 먼 지역으로 내보낸다. 마지막까지 부모의 곁에서 집안의 화로 불을 꺼트리지 않고 지키는 아들은 막내다. 몽골에서 막내는 가문의 진정한 상속자다.  

반면 셋째 아들 우구데이는 애매했다. 차가다이의 카리스마나 톨루이의 전투력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지 못했다. 지명제였다면 그는 아마 칸으로 등극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쿠릴타이는 선출제도였다. 반드시 최선의 인물이 뽑히진 않았다. 

우구데이는 술을 좋아했다. 누구에게도 불편을 주지 않는 호인이었다. ‘유목제국사’를 쓴 르네 크루세에 따르면 그는 “서투를 뿐 아니라 게으르고 유쾌한 주정뱅이”였다. 예나 지금이나 술꾼에겐 적이 드물다. 

차가다이는 장남 주치와 싸울 때 이미 칭기즈칸의 눈 밖에 났다. 차가다이도 톨루이보다는 우구데이를 편하게 생각했다. 전사인 톨루이가 즉위하면 자신의 입지가 위축될 게 뻔했다. 내가 안 되면 누구를 밀어야 하나? 그런 정치적 계산쯤은 형제들 모두 할 줄 알았다.  

‘화로의 수호자’ 톨루이는 쿠릴타이의 감독 역할을 맡았다. 1229년 봄에 열린 쿠릴타이에서 우구데이가 새로운 칸으로 선출됐다. 칭기즈칸의 뜻이 많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제국 경영에는 때론 날카로움보다 원만함이 유리할 수 있다. 

2대 칸 우구데이는 새로운 수도 카라코룸을 건설했다. 몽골의 자랑인 역참제도를 마련했다. 상당한 시간을 의미하는 우리 말 ‘한참’은 몽골의 역참제도에서 나왔다. 원래는 역참사이의 거리를 의미했다. 

조세와 행정도 정비했다.  하지만 신도시 건설과 궁중의 사치로 지나치게 재정을 낭비했다. 엄청난 재정 소모는 새로운 정복전쟁에 대한 필요를 불러 왔다. 몽골은 생산력을 갖지 못한 나라였다. 초지에서 기른 양으로는 제국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남송과 인도, 중동, 유럽 등이 새로운 정복지로 검토됐다. 수보타이는 유럽 정복을 주장했다. 그루지아와 러시아 원정을 경험한 수보타이는 그 곳의 광대한 초원에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새 칸의 관심은 땅이 아니라 전리품이었다.  

새 칸은 양동작전을 결정했다. 유럽과 남송으로 나누어 군사를 보내겠다는 대담한 스케일이었다. 칭기즈칸 연구가 잭 웨더포드는 “2차 대전 때 미군이 유럽과 태평양에서 동시에 전투를 벌이기 이전 어떤 군대도 이런 모험을 시도한 적 없었다”고 평가했다.   

남송 정복은 어려움을 겪었다. 중국 남부의 습하고 무더운 기후는 말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개전 초 총 사령관 쿠추가 죽었다. 황태자로 불리던 우구데이의 아들이었다. 전쟁은 교착상태로 20년을 허비했다. 

유럽 원정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몽골군의 활약은 유럽에 또 한 번 공포를 심어주었다. 세계 전쟁사에 남은 혁혁한 전공이었다. 당시 유럽 원정군은 몽골군의 올스타 팀으로 손색없었다. 

사령관은 조치의 장남 바투, 3대와 4대 몽골의 칸으로 등극하는 구육과 뭉케도 합류했다. 모두가 칭기즈칸의 손자들이다. 그들을 받쳐줄 백전노장 수보타이도 함께 했다. 신구의 완벽한 조화였다. 가히 드림팀으로 불릴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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