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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일만 Nov 05. 2022

몽골제국과 양자강 22

마르코 폴로      


중세 유럽은 작은 제후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비로소 민족국가 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유럽은 부국강병을 서둘렀고 네덜란드, 스페인 같은 선두 주자들을 배출했다. 이슬람으로 인해 중국·인도로 가는 길이 막히자 바다 길을 열었다. 

영국은 산업혁명의 성공으로 단숨에 세계 최강 지위에 올라섰다. 당초 영국은 유럽 여러 나라보다 200년 늦게 르네상스를 받아들일 만큼 뒤떨어진 나라였다. 대륙과 떨어진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의 이웃 이슬람 문명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중세 유럽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아바스(737~961) 왕조 시절 이슬람의 화려함은 극에 달했다.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가 여전히 존재했고, 동방의 당 제국이 전성기를 누렸지만 세상의 중심은 ‘신이 허락한 도시’ 즉 바그다드였다. 서양역사가들은 아바스 왕조를 ‘이슬람의 황금기’로 부른다.

바그다드는 문학작품 ‘아라비안나이트’를 낳았다. 그곳에는 100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고, 목욕탕만 만개에 달했다. 삶은 풍요로웠다. 아바스의 칼리프들은 맘루크로 불리는 노예들을 사병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노예들에게 칼을 맡긴 셈이다. 나중에 맘루크들은 주인을 몰아냈다.  

이슬람 가운데 소수인 시아파 중 일부는 이란 북부 천연의 요새에 둥지를 틀고 자객 집단을 키웠다. 그들은 암살이라는 사나운 수단으로 주변에 공포를 수출했다. 

암살자들은 스스로를 ‘페다이’로 불렀다. ‘희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지상의 희생 대가를 사후 천국에서 보상받는다고 믿었다. 오늘 날 과격파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의식 구조와 흡사했다. 


1253년 훌레구가 이끄는 대군이 몽골고원을 떠나갔다. 목적지는 바그다드였다. 2년 전 훌레구는 뭉케 칸으로부터 이란 총독에 임명됐다. 뭉케는 동생에게 “아무다리아강에서 이집트 땅의 끝까지 칭기즈칸의 관례와 법을 확립하라. 누구든지 네게 저항하는 자에게는 굴욕을 안겨주어라”고 명령했다. 1256년 새 해 첫날 훌레구는 아무다리아강을 건넜다.  

그의 앞에는 이슬람의 통치자 칼리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투에 앞서 훌레구는 바그다드의 칼리프와 설전을 벌였다. 훌레구가 먼저 “지상 최고의 힘과 권력을 가진 우리가 너희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어찌 거절할 수 있겠나. 부디 무기를 잡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상대를 자극했다. 

칼리프 무스타심은 “열흘의 성공으로 축배를 들다니. 자신이 모든 세상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젊은이여. 알라의 모든 숭배자들은 모두 내 소유임을 모르는가”라고 답했다. 철없는 쪽은 무스타심으로 드러났다. 바그다드의 약탈은 17일간이나 지속됐다. 그만큼 부유한 도시였다. 

바그다드에는 몽골군을 반긴 사람들도 있었다. 이슬람의 도시에서 숨죽이고 지내온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은 몽골군과의 사전 약속에 따라 교회 안에 머물렀다. 교회 문은 단단히 잠겨 졌다. 출애굽의 죽음의 사자처럼 몽골군은 교회를 그냥 지나쳤다. 기독교인들은 신에게 감사했다. 그들은 훌레구의 부인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중도(북경)로 수도를 옮겼다. 중국 역사에서 처음 북경이 수도가 됐다. 이후 베이징(北京)은 명․청(明淸)을 거치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수도로 자리 잡았다. 몽골의 등장으로 십자군 전쟁은 막을 내렸다.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의 물결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럽의 시대인 근대의 단초였다. 유럽은 어떻게 근대의 문을 열었을까. 어떻게 근대를 서양의 시대로 만들었을까. 그 출발은 산타마리아라는 배였다. 

콜럼버스선장이 이끄는 산타마리아호는 70일간 대서양 위에 떠있었다. 배는 당초 목적지와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원 제국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배는 전혀 낯선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작정 가다보면 황금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스페인 항구를 떠날 때만해도 배 안 여기저기에 황금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상상이 빚어낸 황금이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대칸의 나라’였다. 마르코 폴로가 유럽인들에게 ‘황금의 나라’라고 소개한 곳이다. 

선원들은 모두 부자 되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망망대해에서 한 달을 보내자 선원들은 거칠어졌다. 일확천금의 꿈은 생명의 부재 앞에 흔들렸다. 10월로 접어들자 배안은 폭동 일보 직전으로 변했다. 

콜럼버스는 “며칠 안에 육지가 나타나지 않으면 내 목을 쳐라”고 호언했다. 목숨을 건 흥정이었다. 선원들은 잠시 폭동을 유보했다. 1492년 10월 12일 새벽 마침내 육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럽인들이 단 한 번도 발을 딛지 않은 신대륙이었다. 콜럼버스는 죽는 날까지 그곳이 인도나 중국의 일부인줄 알았다. 


바다 위 70일 동안 콜럼버스는 잠시도 한 권의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 이다. 책에는 동방을 ‘황금의 나라’로 표현되어 있었다. 물론 거짓말이다. ‘동방견문록’에는 거짓과 과장이 쉽게 발견된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과 남송의 전투에 직접 참전했다고 적었다. 남송 전투는 그가 베네치아를 떠나기 2년 전에 이미 끝난 상태였다.   

십자군 전쟁을 치른 유럽인들은 중동의 부를 목격했다. 동쪽 끝에 있는 더 큰 부가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시켰다. 베스트셀러 ‘동방견문록’은 가난한 유럽인들을 유혹했다. 

베네치아를 출발한 마르코 폴로 일행은 4년의 여행 끝에 북경에 도착했다. 마르코 폴로는 파미르 고원과 신장, 감숙(甘肅)을 거쳐 상도(내몽고)에 이르렀다. 마르코 폴로는 그 길에서 ‘검은 돌’을 태우는 사람들을 만났다. 

당시 유럽에선 보지 못한 연료였다. ‘검은 돌’은 석탄이다. 석탄은 18세기 유럽에 산업혁명의 동력을 제공했지만 마르코 폴로에겐 처음 보는 신기한 검은 돌이었다.  

마르코 폴로를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철학자의 돌’이었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마법사의 돌’과는 다르다. ‘철학자의 돌’은 화폐였다. 쿠빌라이는 사초(絲鈔)라 불리던 화폐를 만들어 통용시켰다. 사초는 은 본위 화폐인 중통원보교초로 발전했다. 

평범한 비단 조각 하나가 금이나 은을 대신하여 물건과 교환되었다.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놀란 이유다. 유럽에선 물건을 사기 위해선 반드시 금이나 은을 지참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물건과 물건을 맞교환했다. 


쿠빌라이 치세 원나라는 대규모 교역 국가였다. 항주에는 향신료와 설탕을 가득 실은 인도 배가 들락거렸다. 비단 제품을 실어 나르는 한편 페르시아의 양탄자를 수입했다. 원에 와서 큰돈을 번 유럽인들도 많았다. 

이탈리아 상인 루칼롱고는 북경에 정착해 엄청난 부를 쌓고 있었다. 교황의 친서를 가지고 온 선교사 몬테코르비노는 북경에 교회를 지었다. 마르코 폴로는 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항주를 방문한 오도리코는 “기독교도, 불교도, 이슬람교도가 이 거대한 도시에서 함께 살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인종이 한 권력의 통제 아래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의 가장 위대한 놀라움 가운데 하나다”고 기술했다.       

쿠빌라이는 원(元) 제국을 수립했다. 쿠빌라이는 1271년 대원(大元)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선포했다. 콜럼버스가 그토록 가기를 원했던 나라다. 원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과 서를 연결하는 유례없는 대 제국이었다. 

몸집을 최대한 불린 달(月)은 시나브로 기울게 된다. 쿠빌라이는 1281년 아내를 잃었다. 그의 아내 차비는 쿠빌라이에게 귀중한 정치 참모였다. 마지막까지 신뢰할 수 있는 측근이었다. 

차비에 이어 황태자 진금이 그의 곁을 떠나갔다. 태평양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닌 황제도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막을 순 없었다. 가족을 잃은 쿠빌라이는 술을 가까이 했다. 

추운 지방에서 살아온 몽골족은 술에 익숙하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들도 술 때문에 일찍 스러졌다. 그런 이유로 쿠빌라이는 되도록 술을 멀리해 왔다. 그러나 인간적 상실 앞에서 술을 제외하곤 달리 위안을 찾을 수 없었다. 쿠빌라이는 과도하게 살이 쪘고 통풍을 비롯한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제국은 계속 골칫거리들을 만들어냈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모두 친인척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의 나이 어느새 73세. 당시로선 보기 드물게 오래 산 셈이다. 대도에서 가까운 동방 3왕가 나얀이 반란을 일으켰다.  

쿠빌라이 황실은 손자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그의 적자들은 모두 죽고 없었다. 손자들은 아직 국가의 명운을 건 전쟁을 맡기엔 어렸다. 노 황제 쿠빌라이는 직접 전장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쿠빌라이는 선두에서 군사들을 이끌었다. 오랜 전쟁을 통해 터득한 원리다. 지휘관이 뒤에 쳐져 있으면 군사들은 나태해진다. 반대로 지휘관의 등 뒤를 따르는 군사들은 모두 용맹하다. 쿠빌라이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쿠빌라이의 최대 장점이다. 일단 결심을 하면 빠르게 행동했다.  

쿠빌라이의 건강에 대한 정보는 나얀을 방심하게 만들었다. 통풍으로 거의 움직이지 못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어서다. 코끼리 등에 올라탄 대칸은 요하(遼河)에 위치한 나얀의 본거지를 급습했다. 

전투의 승패는 개전 첫 날 결정됐다. 나얀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로잡혔다. 쿠빌라이는 피를 흘리지 않는 전통적인 몽골식 방식에 따라 나얀을 처형했다. 

반란을 진압한 후 진금의 아들 티무르를 황태자로 간택했다. 쿠빌라이의 뒤를 이은 성종(成宗)이다. 쿠빌라이는 1294년 79세에 죽었다. 그는 몽골 동북부 켄테이(肯特)산맥 어디엔가 묻혔다. 그의 무덤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의 할아버지 칭기즈칸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쿠빌라이에게는 세조(世祖)라는 존호가 추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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