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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Sep 13. 2021

로렌초의 죽음과 가문의 쇠락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1475)>


보티첼리의 작품 중 수작인 <동방박사의 경배>이다. 그의 초기 작품으로, 작품의 주제와 모티브가 베노초 고촐리의 <동방박사의 행렬>과 흡사하다. 똑같이 예수 탄생을 다루었지만, 배경과 복장 그리고 인물은 당시 모습이 아니다. 15세기 피렌체를 배경으로, 메디치 가문의 구성원을 그렸다. 다만 루카 피티의 음모를 모면한 데 감사한 마음으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봉헌 예물로 바치기 위해 의뢰했다고 한다. 

검은 상의를 입고 무릎을 꿇은 채 아기 예수의 발을 감싸고 있는 인물이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 대(大) 코시모이다. 중앙에 붉은 망토를 입은 인물이 그의 아들 피에로, 그 오른편 희고 금빛 나는 옷을 입은 이가 피에로의 동생 조반니로 모두 세상을 먼저 떠난 인물들이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메디치 궁정 아카데미 인문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 크리스토포로 란디노, 풀치 형제들을 모함한 지지자들이 둘러서 있다. 화면 앞 맨 왼쪽 가장자리에서 붉은 옷을 입은 청년이 중요하다. 피에로의 열일곱 살 아들 로렌초 데 메디치이다. 일행 중 혼자 칼을 들고 있다. 위기 때 로렌초가 어떻게 용기를 보였느냐에 초점이 맞춰 있는 게 분명하다.

 

작품을 주문한 인물이 흥미롭다. 차자 계열의 조반니 일 포폴라노이다. 할아버지가 국부 코시모의 동생 (大) 로렌초이고, 아버지가 그의 외아들 (大) 피에르 프란체스코인데, 슬하에 두 아들 중 차남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조용히 살면서 장자 계열이 주목받는 것을 시기심 없이 대했다. 그러나 형 (小) 로렌초와 조반니는 1492년 ‘위대한 자’ 로렌초가 죽은 후 가문의 장자 계열이 피렌체에서 추방될 때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조반니는 재력이 있는 데다 예술을 사랑했다. 메디치궁전에서 약탈한 예술품을 모았으며 특별히 보티첼리와 필리포 리피를 후원했다. 

그는 인물이 준수하고 취향이 세련되어 당대 인기가 대단했다. 그러나 그가 유명해진 것은 예상외의 거물인 폴리와 이몰라의 여백작이자 카테리나 스포르차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첫 남편이 파치가 음모 사건의 주동자 지롤라모 리아리오로,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중 가장 천박한 인물이었다. 이 결혼은 여장부 카테리나로서는 세 번째였고, 폐족이며 지위가 낮았던 조반니로서는 신분 상승의 기회로 작용했다. 하나 덧붙이자면, 그는 유명한 용병대장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의 아버지가 되며, 훗날 첫 방계 출신으로 토스카나 대공에 오르는 코시모 1세 데 메디치의 할아버지다. 

그러나 당시에는 ‘위대한 자’ 로렌초가 1469년부터 피렌체를 통치하던 시기로 작품에 감히 자신의 내면을 드러낼 수 없었으리라 짐작된다. 보티첼리는 도나텔로가 죽기 2년 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예술은 사상을 전달하는 언어여야 한다’는 도나텔로의 메시지를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알레고리를 통해 작품 하나로 장구한 서사가 가능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피에로에게 발탁된 그는 로렌초 시대에 화가로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사보나롤라가 피렌체를 통치했던 격변기를 맞아 그의 작품에도 큰 변화를 보였다.




도시국가로 나뉘어 있었지만, 반도에 거주하는 이탈리아인의 내면에는 ‘로마인’이라는 유대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로마 제국의 부국강병의 원동력으로,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했던 공화정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이를 충분히 의식하며 행동했던 메디치 가문이었지만, 파치가 음모 사건을 계기로 정치적 역량을 더욱 굳건히 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로렌초는 피렌체 공화국 체제에 새로운 개혁을 감행하면서 장악력을 높였다. 그는 할아버지인 코시모처럼 북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힘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강대국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과 평화 유지 정책을 추진했다. 로마 르네상스를 이끌게 되는 교황 식스토 4세에겐 보티첼리와 페루지노 등을 보내 교황의 이름을 딴 시스티나 성당의 내부 장식을 도왔다. 

한편 음모 사건의 주범 중 콘스탄티노플로 도망쳤던 베르나르도 반디니 데 바론첼리는 피렌체로 압송되어 처형했지만, 핵심 주모자 중 유일한 생존자가 있었다. 분쟁의 빌미가 되었던 지역 이몰라를 차지한 교황의 조카 지몰라모 리아리오 백작이다. 사건 당시 로마에 머물러 죽음을 피했는데, 1488년 결국, 암살당했다. 로렌초가 배후로 지목되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여하튼 10년 만에 동생 줄리아노의 원수는 모두 죽었다. 

 

로렌초는 정치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도 공을 들여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으로서 경제적 이익을 취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먼저 유순한 성품의 조반니 바티스타 키보 추기경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그는 1484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되었다. 로렌체는 열다섯 살의 맏딸 마달레나 데 메디치를 교황의 사생아 서른여덟 살 프란체스코 치보와 1488년 정략 결혼시켰다. 

한편 경솔하고 거만한 장남 피레트로의 장래를 어둡게 본 로렌초는 차남 조반니가 성직자의 길을 걷게 했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보아 조반니는 16세에 최연소 추기경이 되었고, 1513년 교황에 선출된다. 레오 10세, 메디치 가문 출신 첫 교황의 이름이다. 또한 희생된 줄리아노의 사생아 줄리오가 1523년에 219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손자 로렌초는 할아버지 코시모로부터 집중적인 경영 수업을 받았다. 병약한 줄리아노 이후를 대비한 조치였다. 그러나 1년은 너무 짧았다. 로렌초는 경영인으로서는 무능했다. 뛰어난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며,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면서 오히려 아버지 코시모를 능가했지만, 신은 모든 재주를 한 사람에게 몰아서 선물하지 않는다. 그는 금융계 수장이면서 기업의 재무제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전문 경영인이라며 토마소 포르티나리로 하여금 자신을 대리케 하였으나 그는 어려서 함께 자란 친구라는 이유로 택했을 뿐이다. 

은행 지점들이 차례차례 도산했다. 1472년 런던 지점이 잉글랜드 에드워드 4세에게 거액을 빌려주었다가 떼 먹히며 파산했다. 잉글랜드가 양모 수출을 금지하자 가업 중 하나인 모직물 사업이 어려워졌고, 이때 에드워드 4세가 양모 거래를 조건으로 요구한 대출을 거절하지 못해 빚어진 결과였다. 이후 1478년 밀라노 지점, 1480년 브뤼헤 지점, 1481년 베네치아 지점이 문을 닫았으며, 코시모가 물려준 유럽 전역의 16개 은행 중 15개가 도산했다. 1492년 5월 9일 로렌초가 43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은행은 피렌체 본점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나마 본점도 로렌초가 사망한 지 2년 후 도산했다. 


피렌체의 르네상스도 덩달아 쇠퇴하였다. 장인에서 예술가로 대접해준 메디치가의 막강한 후원자가 떠나자 그들 역시 로렌초가 묻힌 산 로렌초 성당을 뒤로하고 하나둘 피렌체를 떠났다. 이후 르네상스 미술은 로마로 옮겨가고, 메디치가의 역사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그러나 세상은 ‘위대한 로렌초’가 떠난 그해를 ‘근대의 시작’이라고도 부른다. 그해 8월 3일 제노바 출신의 한 이탈리아인이 신대륙(?)에 도착한 사건을 역사의 변곡점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에스파냐의 여왕으로부터 형편없는 배 두 척을 빌린 그가 10월 11일 밤 2시에 아메리카 대륙 근처의 어떤 섬에 도착했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막대한 은을 가져와 인도와 중국에서 생산되는 비단과 향료와 바꾸는 중계무역이 발달하였다. 콜럼버스가 유럽 내 중상주의(重商主義)가 탄생하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또한 그는 서쪽으로 멀리 항해하여 바다의 끝이 낭떠러지라는 인류의 직관을 무너트렸고, 배에 실은 기존의 비축물로는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한 지점에서도 굴하지 않고 서쪽으로 더 멀리 떠났던 용기를 보여주었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우주가 그렇듯이 역사에도 중심점은 없다. 죽은 로렌초가 새삼 세상의 무심함을 탓할 일이 못 된다는 의미다. 다만 이 지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여기서 말하는 근대가 유럽 위주의 시각이라는 점이다. 대륙에서 평화롭게 살아왔던 원주민에게는 자신들이 인디언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전에 약탈과 착취를 당해야 했던 야만의 시대가 출발했을 뿐이다. 일부 중앙아메리카 국가들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래 150년 동안 1억 명에 달하던 원주민이 유럽인의 학살과 각종 전염병 전파로 30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주장한다. (김경집, <생각의 융합>) 

여하튼 1492년은 피렌체로서도, 세계사적으로도 모두 역사의 한 획을 긋는 해였다. 메디치 가문의 나머지 인물 이야기는 위대한 피렌체 예술가와 함께 이어가는 것이 좋겠다. 피렌체의 격동기를 이끈 사보나롤라가 1490년부터 설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독자들의 동참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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