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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허생 Dec 03. 2016

2. 「문장강화」

대체 불가능한 한글 문장 모음집



문장강화. 이태준

창비. 2016. 376p. 12,000


언어미는 사람의 입에서요, 글에서는 문장미가 요구될 것은 당연하다. 말을 뽑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문장의 허무다. 


"말하듯 노래하라." 공기 반 소리 반 제와피 선생께서 오디션 프로그램 지원자들에게 지겹도록 던진 말이다. 이 말에도 원조가 있었으니, 일찍이 이태준 선생께서는 "말하듯 쓰라"는, 알 것도 같으면서, 하나도 모르겠고, 느낌은 알겠는데, 하지는 못할 것 같은 문장둥절한 문장론을 남기셨다. 이를 집대성한 것이 바로 이태준의 「문장강화」.


'시에는 지용, 문장에는 태준'이라는 말마따나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힌 이태준 선생이라고 하나, 100년 후에 태어난 나 같은 후손이, 월북까지 한 선생의 명성을 들었을 리는 없을 터. 알라딘의 상술에 넘어가 책을 쥐게 되었음을 이실직고한다. (그마저도 정희진 선생의 추천사와 사은품 노트가 결정적 역할을...)


충동구매의 표본이라 할 만큼 즉흥적으로 구입했음에도 책 내용이나 디자인 등 전체적인 만족도는 여지껏 이런 책을 모르고 살았던 게 부끄럽다, 싶을 정도로 높았다.



1. 글쓰기 책이야 어느 서점을 가더라도 발에 차일 만큼 많아 '글쓰기', '문장' 등의 단어가 피로감을 일으킬 정도지만, 「문장강화」는 한 번쯤 거칠만 하다, 는 게 읽고 난 후의 솔직한 심정이다. 제일 효과적인 글 연습은 좋은 글을 많이 접하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쓰라는 둥, 저렇게 쓰라는 둥 설득력 없는 글쓰기 스킬만 강조하는 '글쓰기 코치'보다 「문장강화」가 택한 '좋은 글 많이 보여주기' 전략이 훨씬 본질에 가깝고 효과적이다. 


2. 예컨대, 방정환 선생의 이런 문장을 어디서 읽을 수 있겠는가.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아니 그래도 나는 이 고요한 자는 얼굴을 잘 말하지 못하였다.  (p.132) 


3. 김기림 선생의 이런 문장은 또 어디서 보고.


상은 필시 죽음에게 진 것은 아니리라. 상은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까지라도 손수 갈아서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상은 오늘의 환경과 종족과 무지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상은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상의 시에는 언제든지 상의 피가 임리하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그는 현대라는 커다란 파선에서 떨어져 표랑하던 너무나 처참한 선체 조각이었다. (p.172)


4. 책에서도 지적하듯, 언어가 아닌 문장의 관점에서 우리 문장의 시작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로 볼 수 있다. 게다가 낭독이나 창을 위해 기록된 운문을 제하면, 본격적으로 한글 문장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년이 조금 더 되었을 뿐이다. 이 책을 1939년에 썼으니, 「문장강화」는 한글 문장의 태동부터 틀이 잡히던 시기까지 생생한 기록물이 담긴 대체 불가능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5. 「문장강화」를 구입하기 전 읽었던 여러 후기에서 대체로 조금 민망할 정도의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뭐어, 그리 대단한가, 싶은 마음으로 책장을 펼친 나도 그 찬사의 행렬에 동참하고야 말았다. 평가가 전체적으로 후했던 거, 인정한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책이라는 것도 알아줬으면.



오독지수: 8.5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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