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불가능한 한글 문장 모음집
문장강화. 이태준
창비. 2016. 376p. 12,000
언어미는 사람의 입에서요, 글에서는 문장미가 요구될 것은 당연하다. 말을 뽑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문장의 허무다.
"말하듯 노래하라." 공기 반 소리 반 제와피 선생께서 오디션 프로그램 지원자들에게 지겹도록 던진 말이다. 이 말에도 원조가 있었으니, 일찍이 이태준 선생께서는 "말하듯 쓰라"는, 알 것도 같으면서, 하나도 모르겠고, 느낌은 알겠는데, 하지는 못할 것 같은 문장둥절한 문장론을 남기셨다. 이를 집대성한 것이 바로 이태준의 「문장강화」.
'시에는 지용, 문장에는 태준'이라는 말마따나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힌 이태준 선생이라고 하나, 100년 후에 태어난 나 같은 후손이, 월북까지 한 선생의 명성을 들었을 리는 없을 터. 알라딘의 상술에 넘어가 책을 쥐게 되었음을 이실직고한다. (그마저도 정희진 선생의 추천사와 사은품 노트가 결정적 역할을...)
충동구매의 표본이라 할 만큼 즉흥적으로 구입했음에도 책 내용이나 디자인 등 전체적인 만족도는 여지껏 이런 책을 모르고 살았던 게 부끄럽다, 싶을 정도로 높았다.
1. 글쓰기 책이야 어느 서점을 가더라도 발에 차일 만큼 많아 '글쓰기', '문장' 등의 단어가 피로감을 일으킬 정도지만, 「문장강화」는 한 번쯤 거칠만 하다, 는 게 읽고 난 후의 솔직한 심정이다. 제일 효과적인 글 연습은 좋은 글을 많이 접하는 거라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쓰라는 둥, 저렇게 쓰라는 둥 설득력 없는 글쓰기 스킬만 강조하는 '글쓰기 코치'보다 「문장강화」가 택한 '좋은 글 많이 보여주기' 전략이 훨씬 본질에 가깝고 효과적이다.
2. 예컨대, 방정환 선생의 이런 문장을 어디서 읽을 수 있겠는가.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아니 그래도 나는 이 고요한 자는 얼굴을 잘 말하지 못하였다. (p.132)
3. 김기림 선생의 이런 문장은 또 어디서 보고.
상은 필시 죽음에게 진 것은 아니리라. 상은 제 육체의 마지막 조각까지라도 손수 갈아서 없애고 사라진 것이리라. 상은 오늘의 환경과 종족과 무지 속에 두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천재였다. 상은 한 번도 '잉크'로 시를 쓴 일은 없다. 상의 시에는 언제든지 상의 피가 임리하다. 그는 스스로 제 혈관을 짜서 '시대의 혈서'를 쓴 것이다. 그는 현대라는 커다란 파선에서 떨어져 표랑하던 너무나 처참한 선체 조각이었다. (p.172)
4. 책에서도 지적하듯, 언어가 아닌 문장의 관점에서 우리 문장의 시작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로 볼 수 있다. 게다가 낭독이나 창을 위해 기록된 운문을 제하면, 본격적으로 한글 문장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년이 조금 더 되었을 뿐이다. 이 책을 1939년에 썼으니, 「문장강화」는 한글 문장의 태동부터 틀이 잡히던 시기까지 생생한 기록물이 담긴 대체 불가능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5. 「문장강화」를 구입하기 전 읽었던 여러 후기에서 대체로 조금 민망할 정도의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뭐어, 그리 대단한가, 싶은 마음으로 책장을 펼친 나도 그 찬사의 행렬에 동참하고야 말았다. 평가가 전체적으로 후했던 거, 인정한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책이라는 것도 알아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