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는 생각
밥을 꼭꼭 씹는 편이다.
녹말의 호화로 단맛이 적당히 올라온 입 안에 새콤한 김치가 들어가면 귀와 턱 사이가 찌릿해지는데, 가끔 이 전기 자극은 어릴 적 '아이셔'를 처음 먹었던 순간으로 나를 데려간다. 흰쌀밥과 김치의 조합은 그 일상성만큼이나 와일드하다.
국은 두 손으로 그릇을 안고 마신다. 두 손을 모아 그릇을 안으면 없던 겸손이 우러나기도 하고 국이 더 소중해 보이는 효과가 있다. 국그릇 말고 다른 물건들도 이렇게 안으면 비슷한 느낌이 난다. 두 손을 모으는 행위가 주는 묘한 기분이 좋아서 어떤 아침은 눈 뜨면 침대에 누운 채 쓸데없이 두 손을 모으기도 한다.
다시 영롱한 밥그릇을 쳐다본다. 창가 나뭇잎에 걸린 햇살이 밥에 후리카게를 뿌려댄다. 거실 창가에 있는 나무는 바람이 불면 잎이 하나하나 까불거리고, 길 건너편 야자수는 몸 전체를 크게 '흔-들'하는데 개인적으론 바람에 호들갑 떠는 잎이 좋다.
후리카게 얘기 나온 김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은 시소유카리(しそゆかり)! 말린 보라색 깻잎을 잘게 잘라 소금과 섞은 것인데 이걸로 주먹밥을 만들 때 배어 나오는 특유의 연보라는 가끔 입에 넣기 힘들 만큼 곱다. 계속 바라보고 싶은 욕망에 대형 캔버스에 주먹밥을 붙여놓고 정착제를 뿌리고 싶은 날도 있다.
시소유카리의 연보라만큼 밥 위에 흩날리는 햇살도 예쁘다. 이것만 있으면 평생 심심하진 않겠구나 싶을 만큼 예뻐 미칠 것 같다.
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지겹도록 많은 글에 복제했지만 자꾸 쓰지 않으면 목구멍이 간질거려 기침하듯 쓰게 된다. 어떤 비평가들은 웨스 앤더슨(Wes Anderson)을 자기복제적 창작자라 비난한다. 그의 작품을 보면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도 알겠지만, 내가 나 복제하겠다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다 남의 말이고 담론이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 같은,
초심을 지켜야 한다는 말 같은.
내게 초심은 지켜야 할 무언가라기보다는 넘어서야 할 것이기에 그때그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고 싶은 걸 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초심을 넘어서는 심에 다다르고 끊임없이 잘 흐르는 마음이 되어 초심에 발목 잡히지 않게 된다.
끊임없이 흐르는 상태의 나를 꿈에서 본 적이 있다.
은하단 모양이었다. 나는 하나이자 모든 것으로 자기복제를 하고 있었다. 일자一者의 자기복제가 천지창조였고 우리 모두가 일자였다. 자기복제는 매너리즘이나 나태가 아니라 복제할 자기 세계가 있어 그저 자꾸만 드러난 것이었다.
밥 먹다 씹은 김치의 전기 충격이 은하단까지 닿았다.
그럴 수 있지.
정죄하지 말자.
존재의 특권이다. 오늘도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