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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May 01. 2023

남편 친구들과 놀아주는 일




베니토를 만났다.

일 년 만이다. 원래 남편 친구지만 셋이 잘 노는 편. 사고가 거침없고 행동은 섬세하며 말투가 느긋한 베니토는 나보다 다섯 살 어리지만 할배미(할아버지적 아름다움)마저 갖춘 사람이다.


"누나 요즘도 혁신적으로 잘 살고 있죠?"

(Are you still reinventing yourself?)


예열 따위 던져버리고 마치 하나의 대화를 몇 년째 이어가는 듯 툭 던지는 첫마디. 질문이 맘에 들어 큭큭거리는 와중에 내가 요즘 뭘 혁신적 걸 했나 급하게 체크해 본다. 어쩜 이렇게 하나도 없을 수가 있나 싶은 동시에 대답을 하고 있는 나:


"당연하지. 요즘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굉장히 별일 안 하고 살아. 혁신 그 자체."




베니토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구글에 일 년 다니다 그만두었다. 그만둔 계기는 새벽 2시까지 이메일을 주고받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래서 사표를 냈다고 한다. 그렇게 첫 직장에서 나온 그는 20대 대부분을 여행하며 보냈고 평양에서 케이프타운까지 다양한 군상들을 조우하다 비슷한 여자를 만나 결혼했다.


아내도 트래블널스(travel nurse)라 둘 다 직업적으로 묶여 있지 않다 보니 3-4개월에 한 번씩 거처를 이동해 가며 2년째 느린 여행 중이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곳이 앨버커키(뉴멕시코)였고 다음 주부터 버클리(캘리포니아)에 산다.


"트래블널스는 소속 간호사보다 처우가 좋으니 여행하기도 좋고 여러모로 잘 됐네."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해요. 더 받는 사람이야 좋겠지만 거기 소속된 분들에겐 너무 불합리한 시스템 같아요. 업무량이 크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닌데 훨씬 더 받으니..."


그는 다중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다. 최근 푸에르토리코를 다녀온 이야기부터 새로운 분야로의 사업 확장까지 조곤조곤 얘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팟캐스트 같았다. 나는 최근 사막에서 죽을 뻔 한 이야기를 메소드적으로 풀어냈고 그는 환호했다.




한참을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던 중 갑자기 뭔가가 머리를 스친다.


남편이 옆에 버젓이 앉아 거의 한 시간째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


남편은 자기 친구면서도 대부분의 대화를 내가 떠맡도록 교묘히 조종하는 버릇이 있고 결혼 후 5년을 기점으로 심각한 수준에 다다랐다. 남편이 잘 듣는 타입이다 보니 친구들이 말하기 좋아하는 타입이 많은데 결혼 후 정신을 차려보니 남편 친구들 말 들어주기는 내 업무가 되어 있었다.


물론 베니토처럼 인간 자체가 재밌고 사려 깊은 스타일은 무리 없이 한참을 얘기하고도 기가 빨리지 않지만 하루는 정말 자기 말만 주구장창 하는 남편 친구 대하다 몸살 나서 싸운 적도 있다.


"자기는 자기 친군데 왜 대화에 참여를 안 해? 당신 친구들 사랑 안 해? 관심 없어? 아니, 이럴 거면 도대체 왜 만나?"


"... 그냥... 나는 친구들 얼굴만 봐도 만족하고 듣는 게 더 재밌어."


"나야말로 그냥 듣는 거 더 좋아하는 사람이야! 사람이 말을 하면 리액션을 해야지!“


"알았어 다음부턴 나도 리액션할게."


'내가'도 아니고 '나도'에 여전히 어이가 없었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런 걸로 이혼할 수도 없고 다른 부분은 꽤나 멀쩡한 편이므로.


그래도 오늘은 상대가 베니토라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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