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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Sep 18. 2023

남편이 자꾸 따라온다

밤산책, 사막, 별




발목은 아직 울긋불긋 하지만 붓기가 사그라들었으므로 저녁 먹고 산책을 나선다.


혼자 가고 싶은 마음에 - 남편을 사랑하지만 산책은 한사코 혼자 하고 싶은 무언가이다 - 조용히 준비를 마치고 남편의 시선을 피해 현관까지 무사히 도착해 열쇠를 집어드는데(미국은 열쇠를 쓰는 나라) 열쇠 소리를 들은 남편이 소리친다.


"나도!"


.

.

.


"어어...?! 어어어, 같이 갈래?"


"어!(해맑)"


"그래! 근데 나 오늘 끝내야 할 오디오북이 있어서 그거 들으면서 산책할 건데, 괜찮아?"


남편은 미소 지으며 끄덕인다. 그의 표정을 보니 일말의 미안함이 열말로 부풀어 오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러기 싫어서 몰래몰래 나가는 건데 비밀스런 낌새를 알아채고도 따라오겠다는 놈도 보통은 아닌 관계로 미안한 마음은 신발 신으며 툴툴 털어낸다.




오늘의 산책로는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가득한 빅룹(big loop).


집에서 실버레이크 저수지 초입까지 큰 원을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코스에 우리가 붙인 이름이다. 빅룹도 있고 미디엄룹도 있다. 가끔 피곤할 땐 스몰룹으로 간다. 남편도 나도 각자 산책 루트 개발에 관심이 지대한 편인데, 언덕과 샛길이 많은 실버레이크는 그런 우리에게 참 좋은 동네.


집집마다 개성 넘치는 가드닝 스타일, 가끔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꽃향기를 무방비 상태로 마시다 보면 꽃을 만든 이의 사랑이 느껴진다. 내 안의 신성 같은 것이 자극된다. 내가 신인가 싶을 때도 있다. 인간은 모두 조금씩 신이다. 엄마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뭘 만들어 내는 사람들을 봐도 그런 생각이 든다. 사실 돌을 봐도 그렇다고 느낀다. 범신론, 범재신론 뭐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니고. 마침 귓전에서 대행스님이 그렇다고 한다. 와중에 뜬금없이 오디오북 읽어주는 사람 목소리가 거슬린다. 이런 순간에도 다 좋지만은 않다.




예전에도 한번 썼는데 나름 내겐 중차대한 사항이기도 하여 다시 언급해 보자면,


오디오북 읽어주는 사람 목소리... 듣기 편한 목소리 찾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목소리가 감정 과잉이라 인공지능이 읽어주는 책을 부러 찾아 들을 때도 있다.


그러다 한 경상도 교수님을 찾았다.

이 분은 모자람과 넘침 중 전자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는 경상도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책 읽을 때 내는 특유의 서울말 흉내를 내지 않았다.


각주도 읽어주셨다. 이 부분이 참 재밌었다. 각주 읽을 땐 목소리를 살짝 옅게 함으로 폰트 크기를 조절하시는 세심함이 돋보였는데 본문 읽을 땐 11, 각주 읽을 땐 9 사이즈로 읽어나갔다.


전반적으로 마음에 들었으나 이따금 시옷 발음을 영어의 [sh]화 하는 버릇을 지니고 있어 이 부분은 일부 청취자들에겐 딜브레이커가 되겠구나 싶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그녀의 생각이 궁금하다. -> 그녀의 섕각이 궁금하다.


그의 '섕각'이 얼마나 당당한지, 자꾸 듣다 보니 설득될 지경이었다. 한글 자모음의 원형적 발음에 오히려 가까울 지도 모른다는 섕각마저 들었다.




오디오북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남편이 이 산책에 함께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갑자기 불쌍해 보인다. 물론 남편은 스스로 측은하다거나 버림받았다 생각 안 하고 그냥 풍경 즐기고 있음에 틀림없는, 아주 그냥 내외로 건강한 사람이다. 귀에 꽂힌 에어팟을 빼며 남편을 쳐다본다.


"오랜만에 빅룹이네."


"어. 밥 먹고 걸으니까 좋다. 나 최근에 우리 스몰 룹(small loop) 말고 타이니 룹(tiny loop)도 개발했어. 내가 말했나?"


남편은 자신이 최근에 발견한 산책 루트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타이니 룹에서 끝날 줄 알았던 설명은 마이크로룹을 거쳐 나노룹에 이르러서야 마무리되었다. 남편이 원래 말이 없는 편이었는데 작년부터 나보다 말이 많아졌다.


신혼 때 남편이 하도 조용해서 이혼해야 하나 진심 고민했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집에 거의 다 와서 남편이 말한다.


“이번주 금요일 그믐인데 별 보러 갈까?”




레드락. 주변에 빛공해(light noise)가 없어서 미 전역에서 별을 보러 온다. 은하수를 보자 눈물이 주르륵.
은하수가 선명히 보였는데 폰카메라에는 담기지 않았다. 죠슈아트리(우) 일곱시 방향으로 북두칠성이 보인다.
별똥별도 여러개 보았다. 남편은 12개 나는 8개. 그믐날이면 흔히 볼 수 있다.
텐트 겉 커버를 벗기고 밤새 자면서 별을 보고 또 봤다. 아침에 일어나니 북극성만 남아있고 이내 또 해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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