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ggy malibu
일요일 아침,
눈꺼풀을 밀어 올리자 네모나고 하얀 천장이 드러난다. 안구건조증인지 몰라도 가장자리가 하얗게 파도가 부서지는 천장. 어제 바다에 가지 못해 한이 생긴 건 아니다. 나는 한 생기고 억울하고 그런 재질 아니니까 어제 단발머리 출렁출렁하면서 다 털어냈다. 그리곤 남편이랑 맛있게 저녁 먹고 깔깔거리다 잤다.
근데 말이야...
자꾸만 생각이 난단 말이야. 아아. 바닷물에 젖은 모래를 너무나 격하게 밟고 싶...
결핍감에 사로잡히려는 찰나, 침대를 박차고 나온다. 내면의 징징거림은 자고로 조금만! 받아주는 것이다. 거실에 가보니 남편이 손에 한가득 짐을 지고 미소 띤 얼굴로 내 세계로 입장한다. 저런 염화미소스런 표정으로 입장하니 오늘은 내 게임에 끼워주기로. NPC에서 엄연한 플레이어로 변신한다.
손에 짐꾸러미를 보니 일주일 치 장을 봤나 보다. 혼자 조용한 아침에 장 보는 게 재밌었는지 남편 표정이 어제보다 어질다. 마침 나도 어제보다 어진 것 같아 오랜만에 '상의'를 해본다.
"우리 산타모니카 가서 좀 걷다올까? 짐 많이 가지고 가면 힘드니까 파라솔 같은 거 없이 그냥 맨몸으로 가서 한 시간 걷는 거 어때? 재밌겠지?"
"산타모니카? 당신 시끄러운 거 싫어하잖아. 말리부 갈까?"
어제 남편 미간에는 "상의를 시도할 시 90% 확률로 실패 예상"이라고 써 있었다. 오늘은 "해볼 만함"이라고 떡하니 초록불이 들어와 있길래 해봤더니 역시. 내가 보는 남편의 표정은 항상 직관적 정보로 넘쳐난다. 직관은 데이터에 기반하므로 지난 십 년간 면밀히 그의 표정을 분석한 나에게 기립박수를 보내며 퐁신한 샌들에 룰루랄라 올라탄다.
해무가 자욱한 말리부.
바다만 해도 황송한데 안개까지 더해지니 감탄병이 도졌다. 나는 안개를 사랑한다. 남편은 신혼 때 내가 감탄 잘하는 걸 보고 신기해했으나 3년 정도 지나자 식상해졌는지 더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 남편이 마음에 들었다. 자연스런 사람이다.
남편이 반응하건 말건 나는 감탄병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중증으로 치닫고 있으므로 혼자 실컷 감탄한다.
'와... 미쳤다. 이게 말이 돼? 이거 누가 만들었어 진짜 이거 넘 심한 거 아냐?'의 무한루프 혼잣말 중얼중얼 대잔치가 벌어지는 와중에 남편은 그저 한번 웃으며,
"멋있네."
끝.
아니 이렇게 예쁜 걸 저렇게 짧게 표현하면 한이 생기고 억울함이 쌓이지 않는지...
가끔 심히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