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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CI Oct 17. 2023

캄캄한 밤

John Muir Wilderness




M83의 Outro는 별 보기 좋은 곡이다.  


캠프파이어 열기로 무릎은 따뜻하고 고개를 뒤로 한껏 젖혀 바라본 하늘엔 우거진 별이 웅성웅성. 음악을 타고 별빛이 이끄는 대로 M83에 도착한다.  


다른 별에 왔으니 뭐라도 써야 하기에 끄응차 일어나 더듬더듬 차에 있는 랩탑을 들고 온다. 남편은 텐트에 쓰러져있다. 혼자 16마일 하이킹을 했기 때문이다. 원래 같이 할 일이었는데 중간에 싸워서 나는 캠핑장으로 돌아오고 남편은 기어이 혼자 다녀왔다.


다른 별에 온 소감을 쓰기로 했는데 갑자기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꾸역꾸역 올라오니 한번 먼저 써 보자.   


사실 이 싸움은 하루 묵은 것이다. 어제 시작되었는데 오늘까지 연장전 (최근 몇 년 새 연장전 잘 안 했는데 오랜만)을 벌이게 되었다.


어제 샌디에이고에 있는 한 대학교(UC San Diego)에서 글씨를 썼다. 레베카와 남편이 도와줬는데 이 조합이 힘들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예상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으로 힘들었다. 물론 남편이 구멍이다. 도와줘서 정말 정말 고맙긴 하다. 진심. 그러나 구멍이 커도 너무 컸단 말이지.


이를테면 이런 것:

남편은 의견 내기를 좋아한다. 내가 핸드폰 말고 고프로로 촬영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럴 거 까지 있어? 그냥 내 핸드폰으로 찍을게.'에서 시작하여 행사 스탠딩 배너가 바람에 눕지 않게 쌍방향으로 묶어 달라고 하면 '그럴 거 까지 있어? 하나도 충분해' 요론 느낌.


평소에 양반인 사람이 왜 하필 필요시에 비양반적 행동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종일 도움은커녕 '그럴 거 까지 있어?'를 남발하는 바람에 활활 타오르는 화기로 글씨를 써야 했고 한글날 퍼포먼스에 훨씬 못 미치는 - 겉으로 표는 안 나지만 나만 아는 - 글씨가 나왔다.


남편도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좋은 소리도 못 듣는 상황이 억울하여 서로 삐진 가운데 샌디에이고에서 엘에이까지 오는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둘 다 배는 고파서 중간에 인앤아웃 들러서 더블패티 버거 야무지게 먹고 집에 올 때까지 침묵을 유지.


녹초가 되어 집에 오니 남편은 담날 캠핑 간다고 짐을 싼다. 아, 내일이구나. 새벽 4시 출발 예정.




캠핑장에 와 보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알파인(alpine) 스타일. 침엽수 많고 얼음 공기에 호수 많은 스타일. 숨 쉴 때마다 콧구멍에서 폐포에 이르기까지 공기의 여정이 자동으로 그려진다. 새삼 숨 쉬는 존재임에 감탄한다. 이런 삶을 받아놓고 부부싸움이나 하다니 자괴감에 휩싸이려는 찰나,


괜찮다. 실수하고 만회하고 그러고 사는 것이다. 자괴감은 1초만 용인한다.


풍광이 주는 힘에 낚여 남편은 텐트를 치고 나는 모닝커피를 내리며 하하호호 마치 싸운 적 없는 사람들처럼 사이좋게 놀았다.




하이킹이 시작되고 남편의 목표지향적, 나의 풍경지향적 걸음이 시작된다.


남편 이마에는 '아찌는 걸음이 느리고 온갖 자연물의 디테일에 도취되는 스타일이므로 오늘 16마일 하이킹의 큰 걸림돌이 될 것으로 예상'이라고 써 있다. 물론 내 이마에는 '당신은 목표에 눈이 멀어 시시각각 펼쳐지는 신성의 향연을 놓치고 있다'는 정죄 문구.


서로의 이마를 확인한 우리는 멀찌감치 떨어져 걷다가 급발진한 나의 탐진치로 인해 헤어지고 만다.


"당신 그렇게 꼭대기가 좋으면 혼자 가. 자동차 키 나한테 주고."


가끔 이렇게 헤어져 주는 것도 서로에게 좋았기에 우리는 하루종일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해질 무렵이 되자 얼굴에 소금을 바르고 나타난(땀이 났다가 말랐다가 X 100회) 남편. 애잔한 소금기 미소는 나를 무장해제시켰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격한 포옹식을 마친 후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캠프파이어에 불이 은은히 타기만 하고 활활 붙지를 않았다. 추워 죽겠는데 활활 타오르지 않아 속상했다. 남편이 은은한 불의 원인 분석에 몰두한 사이, 나는 텐트 주변에 떨어져 있던 크고 잘생긴 솔방울들을 모아 와서 불에 넣어보았다.


솔방울 크기가 대부분 내 얼굴만 했고 잘 마른 데다 방울 중심부가 의외로 두꺼워, 하나당 10분은 족히 타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활활! 솔방울의 피보나치 패턴 사이사이가 이상적 너비로 벌어져있어 완전연소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남편은 홀쭉한 장바구니를 옆구리에 메고 사라져서는 빵빵한 장바구니로 만들어 돌아왔다.


송진이 열에 닿자 기름으로 변하면서 환상적인 향을 뿜기 시작했다. 솔방울이 주는 트립(trip, 향정신성 물질 등이 일으키는 환각)에 몸을 맡긴 우리는 급기야 건설적이고 따스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사계의 정서가 담뿍 담긴 하루를 보내고, 홀로 불을 바라보며 M83에 도달한 감흥을 이야기하려 했으나 이미 지면이 꽉 차버렸네.




화학물질 연소시 노랑은 나트륨, 보라는 칼륨 아직도 기억남.
샌디에고 대학교에는 아시안계 친구들이 많았다


남편 혼자 꼭대기에서 찍어온 사진. 안 가길 잘 했어. 하나도 안 이쁨.
중간에 있는 사진이 베어락(bear lock)인데 남편이 저 안에 음식을 다 넣어놓고 갔기에 어떻게 열어야할지 한참 고민함. 곰의 심정을 체휼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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