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明
"깜짝 놀랐죠? 괜찮아요?"
장신의 백발 할머니가 차에서 내리며 말을 걸어온다.
"저 개 말이에요. 나도 맨날 당한다니까!"
이 할머니가 내가 산책하다 놀라는 모습을 봤구나 싶어 나도 급하게 맞장구를 쳤다. 숏컷에 물 빠진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빼빼 마른 몸에 팔다리가 길어 왠지 나처럼 깜짝깜짝 잘 놀라게 생긴 할머니였다. 나는 내면에 불어닥친 소용돌이를 감추기엔 어딘가 종잇장 같은 몸을 지니고 있기에 놀라면 몸이 휘청한다. 운전하며 지나가던 사람이 대충 봐도 보일 정도니 뭐.
이 할머니는 자기를 골탕 먹이는 이 개로부터 똑같이 당하고 있는 타자를 발견하고는 그 사람이 자기 옆을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굳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타자를 상징으로 세워 그간 자신이 받았던 고통도 겸사겸사 달래려는 속셈도 전혀 없다고 할 수 없겠으나 아무렴 상관없었다. 그녀의 행위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는 한참을 서로 얼마나 놀라고, 그 개 때문에 수명이 단축될 뻔했는지를 토로하면서 깔깔대다 헤어졌다.
안 그래도 밝은 아침 햇살이 사랑스러운 할머니로 인해 더 밝게 빛난다. 세상에 이런 자잘한 사랑을 대가 없이 받는 순간이 생각해 보면 참 많고, 거창한 사랑만큼이나 이런 하찮은 사랑이 참 귀한 것 같다. 내 안의 자명自明이 감정으로 솟을 때, 그게 어떤 깊이와 범위라 할지라도 사랑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나는 사랑에 대단한 희생과 고통이 동반되어야 진짜 사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경계한다. 그런 말을 자꾸 하다 보면 사랑하려고 태어난 우리는 시작조차 못해보고 기가 죽어버린다. 누군가의 기를 죽이는 것 만한 해악도 없는데 말이야.
작고 귀엽고 가벼운 사랑의 행위를 힘 들이지 않고 잘하는 사람이 오히려 큰 사랑도 잘하는 것 같다. 그들은 물처럼 여유롭고 거침없으며 자유롭고 가차 없는 사랑을 한다. 남편 친구 중에 이런 사랑을 잘하는 친구가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내 동생이 미국에 놀러 왔을 때, 이 친구는 자기 부인의 직업적 혜택을 이용하여 우리 셋을(나, 남편, 내 동생) 디즈니랜드에 무료 입장시키기 위해 일요일 아침부터 파자마 차림으로 우리와 동반 입장을 한 후 집에 갔다.
편의점에 우유 사러 온 사람처럼 심드렁한 표정으로 임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는 이런 류의 사랑을 숨 쉬듯 자연스레 시전 하며 살아가기에 주변에 사람이 많음에도 미담이 별로 없는 친구다. 그게 마음에 든다. 나는 유재석처럼 미담이 난무하는 사람에 끌려본 적이 없다.
오늘은 이 심드렁한 친구가 내민 미식축구 티켓을 써야 하는 날이다. 하아... 정말이지 관심이 하나도 없는 분야지만 이 친구가 내밀었으므로 한번 가 보기로 한다. 사실 어제저녁을 먹으면서 남편에게 불편한 심기를 호소했다.
"근데... 나 내일 축구 보러 안 가면 애들 삐질까? 원래 당신이랑 셋이 고등학교 동창이고 친구고 하니까... 나 없어도 완전 괜찮지 않아?"
"응 안 괜찮아. 그리고 나도 삐질 거야. 캐롤라인은 당신 본다고 신났어. 나 산에 갔다가 오후 3시쯤 집에 올 테니까 준비 딱 하고 기다려, 알았지?"
미식축구라니 세상에...
경기 방식을 백번 정도 들은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이것을 보러 가야 할 운명에 처한 오늘. 홀로 충만한 주말을 포기하고 시끄러운 경기장에서의 과도한 소셜 액티비티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또 나 혼자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