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왠지 이런 말투를 써 보고 싶네요.
아침에 밖에 나갔더니 오른 뺨엔 따땃한 햇살이, 왼 뺨에는 시원한 가을바람이 한쪽씩 내 양볼을 쥐고 요리조리 마구 흔들어 버리는 바람에 아침부터 굉장히 예쁨을 받았거든요.
예쁨 받는 거 좋아하는 분들은 아침에 뜨는 해 바라보기를 추천드립니다. 아주 광명하게 예쁨 받는 방법 중 하나예요.
가끔 주변에 어른이 되고도 자꾸만 주변인들로부터 예쁨을 갈구하는 분들을 보게 됩니다. 저도 아직 그런 어린이 같은 성향이 있지만, 일말의 희망이 있다면 타자로부터 받는 예쁨은 아주 다양한 예쁨 받는 경로 중 하나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예쁨을 받는다는 것은 사랑과 인정을 느끼는 행위고 인간은 누구나 나이에 무관하게 예쁨 받아 마땅하지요. 그런데 저는 언젠가부터 이 영역은 발견의 영역이지 갈구의 영역이 아님을 알게 되었어요. 하루는 세수하다가 거울을 바라봤는데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너무나 예뻐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어릴 적부터 매일 보던 얼굴인데 아직까지 이 사람이 안 죽고 살아있구나 하는 것에서 일단 참 예뻐보였어요. 감동도 밀려왔고요. 지금까지 이 존재가 사라지지 않도록 주변 존재들이 얼마나 수고하고 참아주었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저릿하기도 하고요.
밥 먹을 땐 밥에게 예쁨 받고, 깨끗이 잘 마른 옷을 입으며 옷에게 예쁨 받아요. 좋아하는 회색 면 츄리닝이 햇볕에 얼마나 잘 말랐는지 다리를 하나씩 끼워 넣으며 감탄이 절로 흐르죠. 이럴 땐 다리가 더 많았으면 싶기도 합니다. 회색 면 츄리닝은 내가 그것을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나를 예뻐해줘요. 나는 입을 때나 감탄하고 말지만 츄리닝은 내가 딴 생각 할때도 나를 계속 따뜻하게 감싸고 있거든요.
자기를 예뻐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존재 자체로 이미 충분히 받았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고, 그 느낌이 자명할수록 나와 남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 느낌의 원천은 신성이나 로고스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자연이나 부모로부터 받은 조건 없는 사랑일 수 있겠지요.
이런 사람은 자꾸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 원천의 힘에 접속함으로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뿌리고 다닙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알아보고 예뻐하지요. 그런데 정작 이런 사람들은 타자가 주는 예쁨이 고맙긴 하지만 큰 관심은 없어요. 어떻게 하면 이미 받은 걸 돌려줄지에 더 관심이 크거든요. 그게 더 재밌고요.
어제 제가 마주한 커다란 예쁨 하나를 들려드릴까 해요. 글 쓴 시점이 어제이고, 글투가 갑자기 달라지는 점 양해 바랍니다.
실버레이크에는 메도우라는 곳이 있다.
저수지 주변에 널따란 잔디밭을 일컫는 곳인데 동네 사람들이 낮이면 우르르 몰려나와 드러눕는다. 영화 종사자, 작가들이 많이 살아서 다들 어딘가에 '근무'를 하지 않는 라이프스타일이다 보니 이렇게 많이들 드러누워 있다.
미식축구 경기장에서 탈탈 털린 영혼을 달래러 달성공원 돗자리를 들고 메도우로 나갔다. 경기에 관한 글을 써 보려다 그냥 드러눕는 게 더 좋은 생각 같아 한참을 엎드려 누워있었다.
등에 내려앉은 포근한 햇살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내 허벅지에서 등에 걸친 구간에 물컹한 것이 철퍼덕하고 나를 덮치는 것이 아닌가.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며 사과를 한다.
"어머, 어떡해! 너무 죄송해요! 아가야 거기 그렇게 눕는 거 아니야!"
뒤돌아보니 이제 아장아장 걷는 포동한 남자 아기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연령대의 아기였고 볼살이 터질 것 같은 애기가 내 등에 누워 생글생글 웃고 있길래 호흡에 잠시 무리가 왔다. 나는 100만큼 웃고 싶었지만 애기가 내 리액션을 보고 놀랄까 봐 50만 내뿜으며,
"어머, 너 내 돗자리 까지 혼자 걸어온 거야? 이름 뭐야? 세상에! 너 진짜 너-어무 귀엽다!“
민망해서 볼이 발개진 엄마가 안도의 웃음을 내비치며 아들 이름을 대신 말한다.
"시드니예요."
"오오오, 이름도 멋져 세상에! 시드니야! 내 돗자리에 놀러 와 줘서 정말 고마워! 완전 영광이야!"
물론 나는 평소에 저런 말투로 말하지 않는다. 영어로 했던 말을 국어로 적다 보니 저게 최선이다. 내 말귀를 알아먹었는지 애기가 양반다리 하고 앉아있는 내 다리에 쏙 들어와 똬리를 틀었다. 이 지점에서 50으로 누르고 있던 나의 내적 텐션은 300으로 치솟았다.
나는 한 없이 사심을 채우고 싶었으나 엄마 얼굴이 빨간색에서 보라색으로 변할 - 미국 사람들은 퍼스널 스페이스 침범하는 것을 중범죄로 여김 - 지경으로 미안해 하길래 엄마 쓰러지기 전에 애기를 번쩍 세워 올렸다.
애기가 통통하니 몸집이 큰 반면 생각보다 여물지 않아 가벼웠다. 그게 또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이 포슬포슬한 사랑의 잡채가 내 등에 엎어지는 바람에 축구 경기장에서 고갈된 에너지가 급속도로 충전되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퐁신한 샌들을 타고 단발머리 출렁이며 집으로 돌아갔다.